[오늘과 내일/심규선]일본의 과녁, 한국의 궁수

  • 입력 2006년 4월 3일 03시 04분


“3월에는 ‘3·1절’이 한일 관계의 무게를 느끼게 한다.”

오시마 쇼타로 주한 일본대사가 대사관 홈페이지에 쓴 칼럼의 첫 줄이다. 그는 2월부터 ‘성북동의 서재에서’라는 ‘대사 칼럼’을 쓰고 있다. 3월 칼럼은 몇몇 산에 대한 추억과 양국의 100대 명산 얘기가 전부다. ‘정치적 언급’은 앞에 소개한 딱 한 줄이 전부다.

그런데 그 딱 한 줄의 예감이 맞아떨어졌다. 그는 고교 교과서에 ‘독도는 일본 땅’이라고 쓰라는 본국의 문부과학성 때문에 외교통상부로 불려 들어갔다. 대사로서는 가장 원치 않는 일이다. TV에서 본 그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일주일 전쯤에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지난달 22일 공주대 강당에 섰다. 공주 일원에서 열린 ‘저팬 위크(일본 주간)’의 개막에 맞춘 기념강연이었다. 고대 일본과 특별한 관계였던 옛 백제 땅에서 열리는 행사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각별했다. 그는 “일찍부터 불교를 비롯한 많은 선진문화가 한반도를 거쳐 일본에 전래됐다”며 “새 시대를 열어 갈 두 나라 젊은이들이 상대국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오시마 대사는 외교부로 불려 들어가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며칠 만에도 미풍에서 돌풍으로 바뀌는 한일 관계의 변화무쌍함을 실감했을 것이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한일 관계의 무게’를 느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요즘 한일 간에 ‘무게’는 없다. 감정과 감정이 부닥치는 ‘가벼움’만이 있을 뿐이다. 동시에 ‘외교’도 사라졌다.

이유는 일본이라는 과녁과 한국이라는 궁수가 모두 움직이기 때문이다. 움직이지 않는 과녁을, 숨을 죽이고 쏴도 맞힐까 말까 한데 양쪽이 모두 오락가락하니 화살은 과녁 근처에도 못 가고 떨어진다. 그래서 짜증만 쌓여 간다.

과녁을 보자. 진심으로 과거사에 대해 반성하고 사과를 했으면, 거기에 걸맞게 행동하고 실천하라. 한국이 일본에 요구하는 ‘언행일치’다. 그러나 듣는 척이라도 하던 일본은 요즘 변했다. 일본은 오히려 다른 의미에서 ‘언행일치’를 하고 있다.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하겠다”고 하면 반드시 참배한다. “독도는 일본 땅”이라고 말만 하지 않는다. 교과서에 확실하게 그렇게 쓰라고 요구한다. 과녁이 얼마나 더 움직일지 모를 일이다.

궁수도 만만찮다. 궁수 중의 궁수인 대통령부터가 그렇다. 한때는 “과거는 묻지 않겠다”고 했다가 갑자기 “배상까지 하라”고 요구한다. 한 걸음 더 내쳐 “야스쿠니신사 내의 전쟁기념관인 유슈칸을 방문하고 싶다”고 말한다. 외교관은 외교력을 발휘할 여지를 잃었다. 도대체 대통령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사람들도 늘고 있다.

야당 의원의 발언이라 에누리를 해서 들어야 하지만 한나라당의 한 당직자가 “노무현 대통령의 어법에 외교상 문제 있는 부분이 많았고, 이것이 일본 정부를 자극해 ‘해 볼 테면 해 보라’는 식의 외교적 대항을 하게 했다고 본다”고 한 지적은 나름대로 설득력이 있다.

‘독도’ ‘교과서’ ‘야스쿠니신사 참배’ 문제는 당연히 일본이 푸는 게 정상이다. 문제를 만든 당사국으로서 한국이 원치 않는 일을 하지 않으면 된다. 그러나 이는 ‘희망’이지 ‘현실’은 아니다. 일본이 국제사회의 비난과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고집을 피우고 있는데 어떻게 할까. 매번 비난성명을 내고 대사를 불러 혼을 내면 될 것인가. 아닐 것이다.

우선 ‘말의 무게’를 회복해야 한다. 신뢰는 ‘일관성’의 다른 이름이다. 꼭 필요한 때, 꼭 필요한 말만 해서 우리 말을 무섭게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일본 국민 중에서도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 늘어난다. 일본만이 우리의 상대가 아니다. 국제사회가 우리의 주장을 옹호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당장 뭔가를 바꾸라고 보채지 말자. 장기전에 대비해 제2, 제3의 전략을 마련해 놓지 않으면 번번이 뒷북만 치게 된다. 화끈하지도 않고 기분도 나쁘지만 그게 빠른 길이다.

심규선 편집국 부국장 kssh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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