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577>卷六.동트기 전

  • 입력 2005년 10월 4일 03시 0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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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박순철
그림 박순철
“내 오늘 이곳을 빠져나가기 어렵겠구나. 패왕께서 맡기신 재화와 사람만이라도 지켜낼 방도를 찾아야겠다.”

마침내 체념한 조구가 그렇게 탄식하며 그때까지도 외롭고 힘든 싸움을 하고 있던 기마 몇 기(騎)를 가까이 불렀다. 그들이 다가오자 조구가 말했다.

“이제 내가 가진 힘을 다해 서쪽으로 가는 길을 열어볼 터이니 너희들은 그 틈을 치고 나가 성고성으로 돌아가거라. 가서 항양(項襄)에게 패왕께서 맡기신 사람과 금옥(金玉) 화뢰(貨賂)를 보전하여 형양성의 종리매 장군에게 의지하라 이르라. 내가 여기서 죽기로 싸워 한군을 붙잡아 두면 너희가 형양성으로 물러날 틈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다시 군사를 풀어 사마흔과 동예를 찾아오게 했다.

“두 분 장군께서는 여기서 중군을 지탱하고 계시오. 내 한 갈래 군사를 이끌고 서쪽을 뚫어, 성고의 항양에게로 가는 사자에게 길을 열어주고 오겠소.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니 내가 돌아올 때까지만 버텨 주시오.”

조구는 사마흔과 동예에게 그렇게 당부한 뒤 몸소 한 갈래 군사를 거느리고 서쪽으로 치고 나갔다. 그 기세가 어찌나 매서운지 일시 한군의 에움이 뚫리며 한 줄기 길이 열렸다.

“가거라. 반드시 성고성으로 돌아가 항양에게 내 뜻을 전해야 한다.”

조구가 그렇게 소리쳐 사자로 뽑은 기마를 서쪽으로 내몬 뒤에 다시 기세를 회복해 몰려오는 한군과 맞섰다. 그 사이 조구의 명을 받은 기마 몇 기가 에움을 뚫고 성고성으로 달아났다. 그들이 무사히 사수를 건너 사라지는 걸 본 조구는 미련 없이 군사를 돌려 사마흔과 동예가 맡고 있는 중군으로 달려갔다.

사마흔과 동예는 아직 중군을 지키고 있었으나 이미 전세는 돌이킬 수 없게 기울어 있었다. 몇 천 남지 않은 초나라 군사들이 두껍게 에워싼 한군의 파도 속에 작은 섬처럼 남아 있었다.

“모두 힘을 내라. 내가 돌아왔다. 이제 우리 사자가 성고성으로 갔으니 멀지 않아 원병이 이를 것이다. 그때까지만 버티면 된다!”

조구가 그런 말로 군사들의 사기를 돋우어 보려 하였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몇몇 장졸이 조구의 외침에 마음을 다잡고 창칼을 고쳐 쥐었으나 에워싸고 밀려드는 한군이 워낙 대군이었다. 모닥불에 떨어지는 눈송이처럼 적진에 뛰어드는 족족 자취 없이 사라져 갔다.

조구는 그래도 그 뒤 한 시진을 버텼으나 마침내는 마지막이 찾아왔다. 겨우 수백 명 남은 군사들과 얼음 깨진 사수가 한 모퉁이에 몰려 곧 한군에게 사로잡힐 처지에 놓이고 말았다. 조구가 문득 하늘을 우러러 보며 처절하게 외쳤다.

“기현((근,기)縣)의 조구, 참으로 멀리도 왔구나. 옥리(獄吏)에서 몸을 일으켜 제후에 오르고, 대사마로 천군만마를 호령해 보았으니 무슨 여한이 있으리!”

그리고는 들고 있던 칼로 목을 찔러 죽었다. 새왕(塞王) 사마흔도 조구의 뒤를 따랐다.

“나도 그러하이. 시골 옥지기에서 일어나 왕 노릇까지 해보았으니 여한은 없네.”

그러면서 조구 곁에서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그들보다 오래 살아남아 빠져나갈 길을 찾던 적왕(翟王) 동예도 끝내는 그들 뒤를 따랐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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