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560>卷六.동트기 전

  • 입력 2005년 9월 12일 03시 0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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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박순철
그림 박순철
한신의 말에 기가 막혀서인지 평원성을 지키던 제나라 장수 전욱(田昱)은 한동안이나 대꾸를 못했다. 격한 감정을 못 이겨 거친 숨만 몰아쉬다가 이를 갈며 받았다.

“아무래도 우리 대왕과 상국(相國)이 교활한 한왕의 꾀에 넘어간 듯하구나. 하지만 어림없다. 나는 이 성을 너희에게 넘겨주라는 왕명이 있기 전에는 결코 성문을 열어줄 수 없다!”

그리고는 곁에 있는 장졸들을 재촉해 싸울 채비를 갖추게 했다. 제나라의 종성(宗姓)다운 기개와 성품이었다.

전욱의 재촉을 받은 제나라 군사들은 아직 잠들어있는 동료들을 깨우고 성안 백성들을 성벽위로 끌어내기 위해 서둘러 움직였다. 하지만 한군(漢軍)은 그들에게 싸울 채비를 할 틈을 주지 않았다. 갑자기 동문과 서문쪽에서 요란한 함성이 일며 조참과 관영의 군사들이 성벽을 기어올랐다.

한신의 부름에 북문 쪽으로 쏠려있던 제나라 군사들은 급히 동서로 달려갔으나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조참과 관영이 서로 다투듯 앞장서 성벽을 기어올라 비어 있다시피 한 평원성의 동문과 서문을 한꺼번에 열어젖혔다. 그래도 제나라 군사들은 한동안 거칠게 맞섰으나 장수들이 모두 죽거나 항복하자 모두 창칼을 내던졌다.

“성문을 닫아걸어라. 아무도 성을 빠져 나가지 못하게 하라!” 평원성을 차지한 한신은 그렇게 엄명을 내려 성이 한군에게 떨어진 일이 바깥으로 전해지지 못하게 했다. 그런 다음 성 안팎의 장졸들에게 가만히 명을 내렸다.

“여기서 밥을 지어먹고 한나절을 쉰 뒤에 역하(歷下)로 간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닫기를 배로 하여 평원성이 우리에게 떨어졌다는 소문보다 우리가 먼저 역하에 당도하여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제나라 장수 전해(田解)와 화무상(華無傷)이 이끈 20만 대군과 힘든 싸움을 치르게 될 것이다.”

이에 평원성에서 한나절을 쉰 한군은 저물 무렵 가만히 성을 나와 역하로 달려갔다. 역성(歷城)은 제수(濟水) 남쪽에 세워진 성으로, 제나라로 보아서는 북쪽에서 내려오는 적을 막는 두 번째의 방벽과도 같았다. 하수를 건넌 적에게 평원성을 잃으면, 제수를 낀 역성에 기대 다시 한번 적을 막아볼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역성 안팎에는 아직도 제나라의 20만 군사가 머물러 있었다. 성밖에 진을 친 화무상이 10만 군사를 이끌었으며, 성안의 전해가 이끄는 군민도 10만을 일컬었다. 그러나 한군(漢軍)이 오지 않으리란 소식 때문에 지키는 것은 시늉에 가까웠다.

때는 동지가 멀지 않은 겨울이라 밤이 긴데다, 한신이 닫기를 재촉해 한나라 군사들은 다음날 해들 무렵 하여서는 벌써 제수 북쪽 나루에서 30리 쯤 되는 황토 골짜기에 이를 수 있었다. 한신은 거기서 다시 군사를 멈추고 소리 소문 없이 쉬게 한 뒤 밤이 어두워서야 움직이기 시작했다. 삼경이 지나 제수 가에 이른 한군은 강물이 굳게 얼어붙기를 기다려 동틀 무렵 제수를 건넜다.

오래잖아 새벽 어스름 속에 저만치 역성이 보였다. 그 한쪽 벌판에 화무상이 이끈 제나라군 진채가 아직도 깊은 새벽잠에 빠져 있었다. 잠시 군사를 멈추게 하고 화무상의 진채를 살피던 한신이 먼저 관영을 불러 말했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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