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61년 밥 딜런 뉴욕무대 데뷔

  • 입력 2005년 4월 10일 18시 4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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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딜런(1941∼) 이전까지 대중음악은 기성세대의 관심 밖이었다. 기껏 개인의 쾌락과 슬픔, 사랑과 눈물을 노래했으니.

틴에이저의 전유물이던 대중음악은 밥 딜런 이후 비로소 “생각하고 고민하고 때로는 마음과 마음이 부딪혀 눈물도 흘릴 수 있는 음악이 됐다.”(가수 한대수)

열 살부터 시를 썼던 밥 딜런. 그의 노랫말은 시였다. 그는 자신이 직접 쓴 시를 청중에게 노래로 들려준 최초의 가수다.

미네소타 출신의 ‘촌놈’은 스무 살 되던 해인 1961년 기타 하나만 들고 무작정 뉴욕에 갔고 4월 11일 그리니치빌리지의 한 클럽에서 처음으로 무대에 섰다.

어지러운 시절이었다. 존 F 케네디 대통령과 마틴 루서 킹 목사가 등장했다 사라졌고 미국은 군사적으로 곳곳에서 다른 세력과 충돌했다.

저항과 반전(反戰) 운동이 거세게 일었다. 밥 딜런은 그 한가운데에 있었다. 1963년 노예해방선언 100주년 기념 행진에서 그는 ‘우리 승리하리라(We shall overcome)’를 열창했다. 그의 ‘바람만이 아는 대답(Blowin’ in the Wind)’은 반전 운동의 상징 같은 노래였다.

그러나 그 시절은 잠시였다.

1965년 7월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 무대에서 밥 딜런은 전기기타를 들었다. 포크가수들에게 전기기타는 상업성의 대명사로 금기시되던 시절이었다.

변절 아닌가. 동료들의 시선은 차가웠지만 그는 동요하지 않았다. 1970년대 이후 그는 내면으로 깊이 침잠했다.

‘우리’나 ‘시대’ 같은 단어는 더 이상 찾기 어려웠다. 그의 노래엔 종교적인 색채가 짙게 드리우기도 했다.

그는 지난해 12월 20년 만에 인터뷰에 응해 이렇게 말했다.

“내가 했던 것은 노래였지 설교가 아니었다. 내 노래를 자세히 살펴보면 어떤 사람이나 어떤 것의 대변자였음을 말해주는 어떤 증거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만일 그렇게 느낀 사람들이 있었다면 그들은 내 노래를 듣지 못했던 것이 분명하다.”

변하지 않는 것이 세상에 어디 있는가. 그의 노래는 굳이 세월을 거스르지 않았으니 아쉬움은 오직 자신이 변하지 않았다고 느끼거나 변화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의 몫일 뿐.

홍석민 기자 smh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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