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27년 국내 최초 라디오 방송

  • 입력 2005년 2월 15일 18시 3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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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미복 차림의 신사가 공손히 절을 하고 마이크 앞에 선다. 연출자는 자칫 잡음이 섞일까봐 손짓 발짓으로 신호를 보낸다. 초창기 경성방송국 풍경이다. 방음 유리벽도 없이 휑한 스튜디오에서 출연자는 청취자에 대한 예절부터 챙겼다.

1927년 2월 16일 국내 첫 정규방송이 시작됐다. 그러나 최초의 음성은 일본어였다. 총독부 주도의 반관반민(半官半民) 조직인 경성방송국은 일본어 70%, 한국어 30%의 비율로 프로그램을 편성했다. 한국인 직원은 3명으로 출발했는데 전설적 무용가 최승희의 오빠인 최승일이 ‘프로듀서 1호’, 그의 부인 마현경이 ‘아나운서 1호’다.

개국 당시 청취자는 1440명에 그쳤고 그중 80%는 일본인이었다. 라디오가 쌀 50가마니 값이요, 한달 수신료는 쌀 두말 값이었으니 ‘청취허가장’이 대문에 붙어있으면 상당한 부잣집이었다.

규모는 작았어도 다사다난(多事多難)하기는 지금 못지않았다. 예능프로 주력인 기생들은 방송 한 달 만에 출연 거부 농성을 벌였다. 왜 출연료가 일본 기생의 절반이냐는 항의였다. 그 다음 달에는 뉴스가 오보를 냈다며 명예훼손 소송이 제기되기도 했다.

1933년 한국어로만 방송하는 제2채널이 생기면서 방송국은 전성기를 맞는다. 방정환이 어린이를 위한 이야기보따리를 풀었고 홍난파의 관현악단이 실력을 뽐냈다. 판소리와 민요는 일본에서 받아 중계할 정도였다.

그러나 1937년 중일전쟁 이후는 암흑기다. 연사가 원고에 없는 말을 하면 마이크가 꺼졌다. 일본군 지원을 독려하는 방송에 명사들이 동원됐다. 1942년에는 미국발(發) ‘이승만 메시지’를 몰래 들은 직원들이 무더기로 쇠고랑을 찬 ‘단파 수신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결국 1945년 일본의 항복 선언을 생중계한 뒤 경성방송국은 미군정에 접수된다. 이후 서울중앙방송국(KBS의 전신)으로 이름이 바뀌면서 1954년 CBS가 등장할 때까지 한국 유일의 방송국 자리를 지켰다.

위성TV에 이어 디지털멀티미디어방송(DMB)으로까지 치달은 우리 방송의 발전사는 놀랄 만 하다. 그럴수록 청취자를 정중히 받든 ‘연미복 신사’의 마음가짐을 방송인들이 되새겼으면 하는 바람이다.

김준석 기자 kjs35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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