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346>卷五. 밀물과 썰물

  • 입력 2004년 12월 30일 17시 5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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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박순철
그림 박순철
한왕 유방은 달리는 말을 채찍질해 정신없이 내달았다. 영벽(靈壁) 벌판에서 중군이 무너진 뒤로 한없이 달린 것 같은데, 해는 아직도 서편 하늘 높이 걸렸고 왼편으로는 여전히 이른 장마로 불어난 수수(휴水)가 시퍼렇게 길을 막고 있었다. 그러나 뒤쫓는 함성은 더 들리지 않았다.

한왕은 그제야 채찍질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겨우 100여 기(騎)가 허둥지둥 뒤따르고 있는데, 장수로는 노관밖에 없었다. 다급하게 쫓기는 중에도 고집스레 싸움수레[전거]를 몰고 기병들을 뒤따르던 하후영이 기어이 보이지 않았다.

동쪽으로 팽성을 치러 떠나올 때 노관은 태위(太尉)가 되어 군막 안에서 한왕을 돕고, 하후영은 태복(太僕)으로 한왕의 수레를 몰며 군막 밖에서 모셨다. 한신이 그 둘에게 3000기(騎)를 내주며 한왕의 갑주와 투구가 되게 한 것은 바로 그와 같은 그들의 소임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제 하후영까지 보이지 않게 되자 한왕은 절로 탄식이 나왔다.

(이런 걸 패망이라고 하는가….)

그러자 그 다급한 총중에도 갑자기 낭떠러지에서 떨어지기라도 하는 것처럼 내몰려 온 반나절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쳐갔다.

패왕 항우와의 전단(戰端)이 열렸다는 전갈을 처음 중군에서 받았을 때만 해도 한왕은 평소의 느긋함과 태평스러움을 지켜낼 수 있었다. 전군에 이어 좌군과 우군이 차례로 패왕에게 길을 내주었다는 급보가 이르렀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대장군 한신의 계책만 믿고, 패왕이 그물에 제대로 걸려드는 걸로만 알았다.

그런데 싸움이 시작된 지 한식경도 안돼 자신을 찾는 패왕의 벼락같은 외침이 중군 안까지 들리자 모든 게 한순간에 뒤엉키기 시작했다.

“한왕 유방은 어디 있느냐? 어서 나와 그 간사한 머리를 바쳐라!”

원래 한신에게서 받은 당부는 그럴 때 한왕도 마주 말을 달려 나가 의제(義帝)를 시해한 패왕의 죄를 묻는 것이었다. 그러나 한왕은 가위라도 눌린 것처럼 몸이 굳어 패왕 쪽으로 말을 박차 나갈 수가 없었다. 항량이 살아있을 때부터 홍문의 잔치에 이르기까지 패왕과 함께하면서 쌓인 무시무시한 기억들이 일시에 되살아나 입까지 얼어붙게 하는 것 같았다.

“저 겁 모르는 천둥벌거숭이가 함부로 노란 주둥이를 놀리는구나.”

겨우 힘을 짜내 그렇게 우물거렸지만 중군 밖으로는 한 발짝도 못 나가고, 3000 갑사(甲士)에 에워싸여 싸움이 되어가는 형세만 바라보고 있었다.

역상((력,역)商)과 근흡(근(섭,흡))이 본부인마를 이끌고 힘을 다해 패왕의 공세를 막는 동안 급한 전갈이 잇달았다.

“새왕 사마흔과 적왕 동예가 이끌던 우군(右軍)이 여지없이 무너져 버렸다고 합니다.”

“주가(周苛)와 기신(紀信)의 별대(別隊)가 초나라 장수 종리매와 용저에게 멀리 쫓겨나 중군 옆구리가 바로 적에게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한왕은 한동안 중군에서 잘 버텨냈다. 홍문(鴻門)의 잔치 때 겪은 일로 속이 떨려오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지그시 자신을 억누르며 싸움의 흐름이 한군에 이롭게 뒤집히기만을 바랐다. 그런데 오래잖아 다시 놀라운 소식이 날아들었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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