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333>卷五. 밀물과 썰물

  • 입력 2004년 12월 15일 17시 5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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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박순철
그림 박순철
한편 역상과 근흡의 호위를 받으며 팽성 남문으로 빠져나간 한왕 유방은 내리 30리를 달려 높지 않은 산악지대로 들어선 뒤에야 겨우 한숨을 돌렸다. 참담한 얼굴로 저물어 오는 사방을 바라보다가 문득 장량과 진평을 돌아보며 말했다.

“여기서 수레를 멈추고 대장군이 이끄는 우리 본진이 뒤따라오기를 기다리는 게 어떻겠소? 그리고 사람을 풀어 흩어진 제후군을 거둬들이면 적지 않은 군세를 이룰 수 있을 것이오.”

“아니 됩니다. 아직은 팽성에서 너무 가깝습니다. 패군(敗軍)을 수습하는 일은 항왕(項王)의 추격에서 온전히 벗어난 뒤라도 늦지 않습니다. 대장군에게 뒤를 끊게 하시고 대왕께서는 팽성에서 한 걸음이라도 더 멀리 떨어지도록 하십시오.”

장량이 지친 낯빛으로 그렇게 받았다. 진평과 노관도 한신의 당부를 상기시키며 내처 달리기를 권했다. 이에 한왕은 눈치 빠르고 날랜 사졸 몇을 대장군 한신이 거느린 한군(漢軍)과 제후군 패잔병들을 자신의 본진으로 이끌 길라잡이로 남겼다. 그리고 수레를 남으로 몰아 저물어 오는 길을 다시 떠났다.

도중 한군데 후미진 골짜기에서 늦은 저녁밥을 지어 먹고 밤새 길을 재촉한 한왕의 본진은 다음날 새벽이 되어서야 군사를 숨길 만한 산자락을 만났다. 한왕이 수레 문을 열고 곁에 따라오고 있는 노관에게 말했다.

“여기가 어디쯤인지 알아보아라.”

잠시 후에 노관이 돌아와 알려주었다.

“이곳 지리를 잘 아는 이졸의 말에 따르면 부리현(符離縣)이라 합니다.”

“그렇다면 계속 남쪽으로만 달려온 셈이로구나. 점점 초나라 깊숙이 드는 꼴이니 남쪽으로 내려가는 길은 이만 그만두는 게 좋겠다.”

한왕이 그렇게 말하고 다시 진평과 장량을 불러 물었다.

“이쯤이면 군사들을 쉬게 하며 대장군이 우리 군사를 거두어 오기를 기다려도 되지 않겠소? 제후군이 우리를 찾지 못해 그대로 흩어져버리는 것도 걱정이오.”

이번에는 장량과 진평도 말리지 않았다. 밝아오는 산자락의 지세를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한 군데 물을 낀 산등성이에 진채를 내릴 땅을 정해 주었다. 등성이가 가파른 데다 앞이 훤히 틔어 있어 특별히 목책이나 보루를 쌓지 않아도 빼앗기는 어렵고 지키기에는 좋은 자리였다.

길라잡이를 남겨 둔 덕분인지 대장군 한신이 거느린 한군은 그날 해가 뜨기도 전에 한왕의 본진에 이르렀다. 원래 한신이 이끌고 있던 5만에다 오는 도중에 이리저리 불러 모으고 찾아든 패잔병이 3만이 넘어 그들이 보태지자 한왕의 군세는 금세 10만으로 부풀어 올랐다.

그러자 겁먹고 놀라 졸아붙었던 한군의 간담이 다시 부어오르기 시작했다. 떠들썩한 인마의 기척이 멀리 들리는 것도, 연기가 높이 솟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아침밥을 짓고 있는데, 갑자기 적지 않은 인마가 먼지를 일으키며 그 산자락으로 몰려들었다.

“적이다. 적이 왔다!”

높은 곳에서 망을 보던 군사의 그런 외침에 놀란 한군 장졸이 급하게 싸울 채비에 들어갔다. 그때 그쪽에서 몇 필의 말이 주저 없이 등성이 아래로 다가왔다. 가만히 살펴보니 길라잡이로 남긴 한군 사졸과 제후군의 깃발을 앞세운 기마 몇이었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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