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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4년 12월 5일 18시 3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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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피해갈 수 있을지 알려고 할 필요는 없다네. 문제는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낸 사상을 위해 마지막 극한까지 노력할 수 있는가, 그것이 중요하다네.”
한 달 뒤인 1961년 12월 6일, 그는 36세의 젊은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1년여 동안의 백혈병에 맞서 소진해진 그의 몸은 합병증으로 닥친 폐렴을 견디지 못했다. 혁명가로서는 다소 어울리지 않는 최후였다.
최후의 장소 역시 혁명가에게 썩 어울리는 곳은 아니었다. 그는 미국을 제국주의적인 프랑스의 벗이라고 여겨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프란츠 파농. 그는 1925년 프랑스 식민지인 서인도제도의 마르티니크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식민세력에 동화된 ‘흑인 부르주아지’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그는 주저 없이 ‘조국’ 프랑스를 위해 참전했다.
부상을 당하고 훈장까지 받은 그는 리옹의 의대에서 정신병리학을 공부하면서 인종적 정체성을 자각하게 된다. 성장기간 내내 부여됐던 ‘프랑스인’이라는 정체성은 백인 식민주의자들의 시각이 피지배 인종에게 이식된 결과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1953년 알제리의 한 병원에서 정신병리학 과장으로 일하게 된 그는 이듬해 알제리 독립전쟁이 터지자 1956년 직장을 내던지고 ‘알제리 민족해방전선’에 참가했다. ‘대지의 저주받은 자들’ 등 피식민 인종의 현실을 고발한 책을 써내면서 그는 아프리카 혁명의 대표적 이론가로 떠올랐다.
숨진 뒤에도 그는 독립과 인종해방을 원하는 제3세계 곳곳에서 지대한 정신적 영향력을 발휘했다. 특히 폭력에 대한 그의 관점은 억압자에 대한 무차별 폭력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도구로 활용됐다.
그러나 알리스 셰르키가 쓴 평전 ‘프란츠 파농’은 파농이 ‘폭력 옹호자’였다는 견해는 지나치게 단순화된 판단이라고 설명한다. 파농은 정신과 의사로서 “약자에게 발언의 장을 열어주지 않는 사회는 폭력적이며, 이는 표현의 권리를 얻기 위한 또 다른 폭력을 부른다”고 말했다. 엄밀히 말해 그는 폭력의 옹호 이전에 폭력의 형성과 상호작용에 대해 사유한 사상가일 뿐이었다는 것이다.
유윤종기자 gustav@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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