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254>卷四. 흙먼지말아 일으키며

  • 입력 2004년 9월 10일 17시 4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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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남왕은 내가 한왕(漢王)의 군중에 있는 게 의아스러울 것이네. 항왕이 나를 상산왕으로 세웠으니 나는 마땅히 팽성으로 달아나 항왕 밑에서 내 나라를 되찾을 궁리를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나라를 잃고 쫓기다 보니 문득 깨달은 게 있어 나는 한왕께서 머무시는 폐구로 가게 되었네. 곰곰이 따져 보면 나를 쳐서 내쫓은 것은 의리부동한 진여(陳餘)나 포악한 전영(田榮)이 아니었네. 항왕의 공평하지 못한 분봉(分封)이요, 그 거칠고 모진 다스림이었네. 곧 천하는 시랑이 같은 진나라의 황제를 내쫓았으나 그보다 더 사납고 무서운 호랑이를 맞은 격이 되고, 진여와 전영은 그런 항왕에게서 떠난 민심을 등에 업고 일어난 걸세. 하남왕이 보기에도 과연 항왕이 천하를 온전히 담을 만한 그릇으로 보이는가?”

장이가 그렇게 묻고 잠시 숨을 고르며 문루 위에 나와 선 하남왕 신양을 올려 보았다. 신양이 굳은 얼굴로 듣고 있다가 담담하게 받았다.

“제가 어떻게 감히 천명을 알 수 있겠습니까? 다만 패왕께서는 거록(鉅鹿)의 싸움 이래 무도한 진나라를 쳐 없애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운 분이라 그 명을 받들고 있을 뿐입니다.”

“그것은 천명이 아니라 일시적인 세력일세. 불같이 노해 큰칼 휘두르며 적장을 쳐 죽이고 제멋대로 하기가 양떼 같은 군사들을 길들인 이리떼처럼 몰아 싸움터를 휩쓰는 것과 높이 남면(南面)하여 천하를 다스리는 일은 다르네. 그런데 한왕께서는 너그럽고 어질어 백성들을 부모처럼 싸안고 보살피시니 지난번에는 관중의 백성들이 한왕께서 관중왕이 되지 못할까 걱정하였고, 이제는 천하 만민이 한왕께서 천하의 주인이 되지 못할까 걱정하네. 천하의 주인 될 이가 있다면 바로 이런 분이 아니겠는가. 내 옛날의 정분에 의지해 하남왕에게 권하겠네. 이제 천하의 주인은 정해졌으니, 더는 자존망대(自尊妄大)한 항왕을 도와 천명에 맞서지 말게. 우리 한왕께 항복하여 함께 한 주인을 모시고 저 요순(堯舜)의 태평성대를 다시 열어 보는 게 어떤가? 이제부터 날 저물 때까지 여유를 줄 것이니 깊이 헤아려 마음을 정하게. 나는 이만 물러가려니와 한왕을 너무 기다리게 해서는 아니 되네. 한나라 10만 대군도 오늘밤을 더 기다려줄 것 같지는 않네.”

장이는 그렇게 말하고 말머리를 돌려 한군의 진채로 돌아가 버렸다. 이미 장이 쪽으로 마음이 반나마 기울어져 성안으로 들어간 하남왕 신양은 다시 대신들과 장수들을 모아 의논했다. 하지만 그들이 아무리 머리를 짜내도 달리 길은 없었다. 거기다가 장이의 뜻을 어기지 못하는 신양의 옛정이 더해지니 결국 성안의 결정은 항복이 되었다.

그날 날이 저물기도 전에 하남왕 신양은 낙양 성문을 활짝 열고 걸어나와 한나라에 항복했다. 한왕이 함곡관을 나온 뒤로 처음 받아내는 항복이었다.

그런데 그 항복을 받는 데서 한왕 유방은 다시 패왕 항우와는 다른 일면을 보여주었다. 자신에게 천하를 다스릴 제도를 고를 기회가 왔을 때, 패왕은 당연한 듯 분권적(分權的)인 옛 봉건제를 부활시켰다. 그러나 한왕은 관중에서 이미 그러했던 것처럼 이번에도 시황제 시절의 군현제(郡縣制)를 되살려 강력한 중앙집권적 통치의 의지를 내비쳤다. 하남왕의 봉지를 하남군(河南郡)으로 삼고 한(漢)나라를 직접 다스리는 땅으로 만든 일이 그랬다. 전에 옹(雍) 새(塞) 적(翟) 세 나라로 나누어져 있던 옛 진나라 땅에다 위남군(渭南郡)과 하상군(河上郡) 상군(上郡)을 둔 것과 마찬가지였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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