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임채청 칼럼]누가 나라를 시들게 하는가

  • 입력 2004년 8월 10일 19시 3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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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년 반 동안 시종 우리 사회를 짓누른 것은 강퍅한 정치논쟁이었다. 그 목록을 대충만 뽑아 봐도 숨이 막힌다. 코드 논쟁이 불길한 서곡이었다. 이어 세대논쟁 자주논쟁 색깔논쟁 대선자금논쟁 등이 마구 뒤엉켜 거센 파열음을 냈다.

최대 고비는 올인논쟁과 탄핵논쟁이었다. 그리고 다시 수도이전논쟁 과거사논쟁 정체성논쟁 등이 우리 사회를 종으로 가르고 횡으로 찢고 있다. 그것들 모두 비타협성과 적대성으로 볼 때 논쟁이라기보다는 투쟁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악성 정쟁의 常時化가 앗아간 것▼

노무현 대통령의 취임사준비위원장을 지낸 지명관 선생의 얘기가 무차별 투쟁을 촉발시킨 원인(遠因)과 근인(近因)을 함께 들려준다. 그는 얼마 전 한 월간지 인터뷰에서 “취임사를 준비하면서 (이미) 내 마음은 노 대통령을 떠나고 있었다”고 말했다.

“우리나라가 이래봬도 10대 경제대국 아닙니까. 이제는 통합의 시대입니다. 그런데 특정 정파가 민주혁명을 한다면서 남을 배격하는 것은 역사 인식이 기본적으로 잘못됐어요…취임사를 준비할 때부터 그런 분위기가 엿보였어요. 노 정권은 시작부터 문제가 많았다는 것입니다.”

지 선생뿐만 아니다. 현 정권 출범에 관여했던 다른 사람들에게서 요즘 그보다 더한 얘기도 자주 듣는다. 이처럼 충실했던 추종자들의 이탈과 외면이 현 정권의 배신감과 고립감, 의심과 오기를 증폭시켜 더욱 외곬으로 몰아가는 요인이 아닐까 싶다.

대통령직인수위 출신의 한 정치인은 “탄핵쇼크가 오히려 노 대통령의 심적 불안정성을 심화시킨 듯하다”고 말했다. 노 대통령이 청와대에 ‘유폐돼’ 있던 기간에 겪었던 무력감과 분노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종종 복잡한 형태로 이를 표출하는 것 같다는 진단이었다.

정쟁이 없는 시대가 있었느냐는 반론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의 정쟁은 과거와는 여러모로 차이가 있다. 공방(攻防)의 어느 쪽이 여권이고 야권인지 알 수 없는 경우가 많다. 민주화 이후만 보면 정쟁의 양태도 어느 때보다도 거칠고 집요한 편이다.

국정을 책임진 여권이 정책외적인 사안으로 정쟁을 촉발하는 경우도 잦다. 때로 그 대상이 정치권의 울타리를 뛰어넘는다. 심지어 청와대가 비정치집단과의 논쟁에 직접 당사자가 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최근 노 대통령은 권력에 비판적인 일부 언론의 보도태도를 ‘완장문화’라고 비난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것이 그 전형적인 사례다.

통상의 허용 범위를 일탈한 악성 정쟁의 상시화(常時化)로 인한 폐해는 일일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여기선 다만 두 가지 본질적인 문제를 거론하고자 한다. 사회적 정상성(正常性)의 붕괴와 국민적 활력의 감퇴다.

본디 완장은 권력의 속성을 표현하는 것인데, 권력이 되레 비판언론에 완장을 채우려는 것은 정상이 아니다. 유죄 판결을 받은 피고인이 재판장에게 항의 전화를 하는 것 또한 정상이 아니다. 상식과 순리, 원칙과 질서가 정상성의 속성인 때문이다.

사실 정체성 규명보다 정상성 회복이 우선이다. 정상이 아닌데 정체를 논하는 것은 무의미하지 않겠는가. 탈(脫)권위주의와 민주화의 대의를 따져도 정상성 회복이 맨 앞자리를 차지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정말 소중한 것이 사라지고 있다▼

가장 심각한 것은 나라가 생기(生氣)를 잃어 가고 있는 것이다. 개발연대의 긍지와 열정은 고사하고 환란(換亂) 때의 의지나 자신감도 찾아볼 수 없다. 굳이 여론조사를 해 보지 않더라도 시들어 메마른 거리에서 희망이 식어 가고 있음을 쉬 감지할 수 있다.

언제나 전거(典據)로 삼는 대통령 취임사를 다시 찾아 읽어 보면서 호사가적인 관심으로 ‘희망’이라는 단어를 찾아봤다. 다른 좋은 말은 많은데 긴 취임사 어디에도 그 말은 없었다. 그저 우연일까. 필자는 부득이 오늘도 완장을 찼다.

임채청 편집국 부국장 ccl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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