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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4년 7월 11일 18시 5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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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레퓌스 사건’이라는 비극적 ‘근대 체험’은 프랑스 사회를 둘로 쪼갰다. 그 격렬한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국론은 분열됐고 프랑스는 사실상 내전(內戰)에 휩싸인다.
프랑스인은 둘 중 하나가 되었다. 드레퓌스 지지파(派)이거나 반(反)드레퓌스파이거나.
1894년 9월 프랑스 참모본부정보국은 프랑스 주재 독일대사관의 우편함에서 훔쳐낸 한 통의 편지를 입수했다.
프랑스 육군 기밀문서의 명세서를 담은 편지의 발신인은 익명이었다.
유대계 장교 알프레드 드레퓌스가 간첩으로 지목된다. ‘명세서’의 필적이 그의 것과 비슷하다는 것이었으나 당시 반유대인 분위기에 편승한 마녀사냥이었다.
드레퓌스는 군사재판에서 종신형을 선고받고 남미 기아나의 ‘악마의 섬’으로 유배된다.
증거를 밝히라는 요구에 군부는 위협했다. “이 엄청난 군사기밀이 공개될 경우 독일과 전쟁을 감수해야 한다.”
재판이 끝난 지 15개월이 지난 뒤 ‘명세서’의 필적이 드레퓌스가 아니라 에스테라지 소령의 것임이 밝혀졌으나 에스테라지는 무죄 방면된다. 세계의 언론은 조소했다. “이제 프랑스는 없다!”
그리고 1898년 1월 13일, 마침내 폭풍우가 몰아친다.
에밀 졸라는 ‘오로르’지에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을 띄웠다. “나는 고발한다!”
그는 드레퓌스의 결백과 에스테라지의 유죄를 조목조목 따진 뒤 일갈했다. “진실이 행군을 시작하면 그 무엇도 길을 막을 수 없다. 그것은 지하에서도 무섭게 자라 세상을 쓸어버릴 것이다.”
그러나 졸라는 군법회의를 중상모략했다는 혐의로 기소돼 영국으로 망명해야 했다.
‘드레퓌스 사건’ 발생 12년 만인 1906년 7월 12일. 프랑스 최고재판소는 드레퓌스 재심에서 그에게 무죄판결을 내렸으나 그 자리에 졸라는 없었다.
그는 1902년 의문의 질식사로 숨졌다. 최근 출간된 장 브델의 ‘암살된 졸라’는 그가 반유대인 세력에 의해 살해됐음을 시사하고 있다.
“나의 편은 단지 진실과 정의뿐이지만 영혼의 외침을 뿌리칠 수 없다”고 했던 졸라.
그의 웅변은 프랑스를 깊은 잠에서 깨웠다.
“그는 살아 있는 양심의 전기(傳記)였다….”(아나톨 프랑스)
이기우기자 keyw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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