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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4년 6월 25일 16시 4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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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중궁궐의 그늘 속에 존재했던 두 직종에 대한 역사보고서. 환관은 언제부터 존재했을까. 중국 고대 은나라 갑골문 기록에 환관이 등장하니 실로 유서 깊은 직종이다. 환관은 중국문화권에만 존재했을까. 아니다. 이집트 로마 그리스 프랑스 이탈리아 터키 등에도 환관은 존재했다. 실권이 없었던 천황제 때문인지 일본은 예외다. 그럼 한국은 언제부터? 기록상으로는 통일신라기 흥덕왕 때이니 환관제가 본격적으로 꽃피었던 당나라에서 수입된 것으로 추정된다.
환관은 어떻게 공급됐을까. 중국은 은나라 때부터 환관을 인공으로 생산했다. 포로를 거세해 환관으로 삼은 것. ‘사기(史記)’ 저자 사마천이 당했다는 궁형(宮刑)이라는 형벌도 있었다. 궁형을 당하면 상처가 아물 때까지 바깥출입을 못한다고 해서 ‘잠실(蠶室)로 보낸다’고 표현했다고 한다. 전문적인 거세기술자인 엄공(엄工)의 도움을 받아 스스로 거세하는 사람도 많았다. 명나라 희종 때 환관 3000명을 모집하는 데 2만명이 지원했다고 하니 환관은 인기직종이었다. 한국에선 효(孝)를 중시해 씨를 말리는 궁형은 도입하지 않았지만 조선조엔 국가가 관리하는 엄공은 뒀다.
중국왕조에선 늘 환관정치가 문제시됐지만 근절되진 못했다. 그러나 조선조에선 환관의 폐해가 상대적으로 매우 적었다. 비록 낮은 벼슬이라도 정사에 관련된 업무를 맡겼던 고려조와 달리 높은 벼슬을 주는 대신 그 역할을 궁궐의 잡일로 한정시켰기 때문이었다.
궁녀의 역사는 물론 환관보다 오래됐다. 중국에서는 은나라에 앞선 하나라의 폭군 걸왕 때 3만명의 궁녀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한국은 백제 의자왕 때가 첫 기록이다. 그러나 삼천궁녀는 후대의 과장이다. 조선조 때도 궁녀의 수가 1000명을 넘는 경우는 드물었다.
통일신라 때 모(母)와 여인(女人)으로 나뉜 궁녀조직은 조선시대 상궁과 나인으로 이어진다. 상궁은 고려 때 중국에서 들여온 호칭이다. 조선시대 궁녀는 대개 4∼16세에 궁궐에 들어와 15년 정도 교육을 받는 견습나인을 거쳐 20세를 전후해 정식나인이 된다. 견습나인 중 4∼5세에 들어온 아기나인들은 생머리를 하고 있다고 해서 생각시로도 불렸다. 상궁은 정식나인이 된 뒤 다시 15년이 지나야 될 수 있었다.
정1품 빈∼종4품 숙원이 후궁 반열이었고 정5품∼종9품에 드는 궁녀는 여관(女官)이라 했다. 여관의 심부름을 맡은 비자, 가정부 역할을 하는 방자, 물 긷는 일과 불 때는 일을 맡은 무수리는 여기에 들지 못했다. 그러나 장희빈이나 영조의 어머니 숙빈 최씨는 무수리 출신이었으니 그들에게도 인생역전의 기회는 있었던 셈이다.
권재현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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