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 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170>卷四.흙먼지말아 일으키며

  • 입력 2004년 6월 4일 18시 0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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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 쓴 원숭이(6)

“그토록 너그럽고 부드러운 도덕군자가 너를 못 본 척 하였으니 섭섭했겠구나.”

그 말에 비로소 우희도 항우의 감정을 알아차린 듯했다. 그러나 조금도 흔들림 없는 어조로 항우의 말을 받았다.

“그리 대단한 도덕군자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듣기로 패공은 그날 밤 그대로 대궐에 눌러앉아 미녀와 재보를 누리며 관중왕(關中王) 노릇을 하려고 했으나, 아랫사람들이 말려 패상(覇上)으로 돌아갔다 합니다.”

“그게 아랫사람들이 말린다고 될 일이냐?”

“그 또한 저희가 듣기로는, 대왕이 두려워서 그렇게 고분고분 물러난 것이라 합니다.”

우희는 그렇게 굳이 변명하는 기색 없이 항우의 심사를 풀어주었다. 은연중에 유방을 하찮게 여기는 감정을 섞은 것이지만 항우에게는 효과가 있었다.

“만약 그러지 않았다면 패공의 목은 그 어깨 위에 남아나지 못했을 것이다. 실은 그게 그자가 목숨을 부지하는 길이었지.”

항우가 그러면서 너털웃음을 흘렸다. 너무도 어울리지 않는 패공의 행적이 마음 한구석에서는 꺼림칙했으나, 항우는 애써 그런 느낌을 털어버렸다. 그리고 새로 맺은 정에 흠뻑 취해 다시 우희를 끌어안았다.

그날 망이궁(望夷宮)의 한 전각을 차지한 항우의 침실에는 새로 얻은 우희 때문에 밤새도록 신방이나 다름없는 봄바람이 불었다. 그러나 날이 밝은 함양 거리에는 여전히 살벌한 섣달 찬바람이 불고 있었다.

약탈로 함양 성안이 거덜 나자 항우의 장졸들은 성밖 멀리 아방궁(阿房宮)으로 밀어 닥쳤다. 아방궁은 한꺼번에 1만명이 앉을 수 있는 마루가 있을 만큼 규모가 클 뿐만 아니라 방마다 단청과 금박을 덮어씌웠다 할 만큼 호화로운 궁궐이었다. 하지만 시황제에 이어 겨우 짓기를 마친 이세 황제가 미처 궁궐로 써 보지도 못하고 죽어 재보를 쌓을 틈이 없었다.

먼 길을 달려가 온종일 뒤져도 별로 나오는 것이 없자 장졸들의 실망은 곧 분노로 변했다. 궁전을 함부로 들부수다 그것만으로는 한에 차지 않아 항우의 단순하면서도 단호한 의로움에 호소했다.

“백성들의 재물을 쥐어짜고 그 피와 땀으로 지은 아방궁을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장졸들은 그 큰 규모와 화려함에 오히려 치를 떨고 있습니다.”

아방궁 쪽으로 나간 장졸들로부터 그런 물음을 받자 우희와 함께 술을 마시고 있던 항우는 시원스레 그들이 듣고자 하는 말을 해주었다.

“태워버려라!”

그 말에 불길에 휩싸이게 된 아방궁은 그 뒤 석 달 동안이나 타올랐다고 한다.

시황제의 능묘를 파헤치게 된 경위도 아방궁을 태울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음날 아직도 우희와의 첫정을 다 풀지 못해 궁궐 안에 머물고 있는 항우에게 계포(季布)가 와서 물었다.

“여산(驪山)에 있는 시황제의 능묘는 어찌했으면 좋겠습니까? 듣기로는 육국(六國)을 멸망시키고 빼앗아 온 온갖 진보가 그 안에 다 들어있다고 합니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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