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168>卷四. 흙먼지말아 일으키며

  • 입력 2004년 6월 2일 18시 4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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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 쓴 원숭이(4)

그 시절의 관습으로 미루어, 항우가 숙부 항량을 따라 처음 군사를 일으킨 스물 넷 나이만 해도 혼인하기에는 오히려 늦은 때였다. 그런데도 항우가 그때껏 장가를 들지 않은 것은 숙부의 쓰라린 경험 탓이 많았다. 하상(下相)에서 그들 항씨(項氏) 형제들이 그토록 어이없이 진나라 관병들에게 당하고 만 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지키고 보살펴야 할 가솔들 때문이었다.

“전란의 시대 큰 뜻을 품은 남자에게 처자는 적의 볼모가 되기 십상이다.”

그렇게 말하면서 항량은 군사를 일으켜 오중(吳中)을 떠날 때까지도 조카의 혼인을 서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뒤 다시 3년 고달픈 전장을 헤매는 동안 이번에는 항우 스스로 하룻밤 잠자리 시중드는 여자조차 마다해 왔다.

항량이 죽은 다음부터, 특히 송의(宋義)를 죽인 뒤로 항우는 초나라 군사를 이끄는 실질적인 군장(君長)이었다. 멀리 회왕(懷王)이 있었으나 싸움터에서는 누구의 통제도 받지 않았고, 또 달리 항우가 금욕해야 할 까닭도 없었다. 하지만 항우가 유별날 만큼 성(性)에 엄격했던 것은 아마도 특유의 자부심과 그 자부심에서 비롯된 결벽(潔癖) 때문이었을 것이다.

피투성이 승리를 거듭하면서 턱없이 자라난 항우의 자부심은 자신이 저급한 욕망에 휘둘리는 것조차 용서하지 못했다. 누구에게도 지지 않고 무엇에게도 꺾이지 않는다―그런 항우의 믿음이 성욕에까지 적용된 셈이었다. 어찌 보면, 나는 너희 천장부(賤丈夫)들과 다르다, 그런 욕망쯤은 얼마든지 이겨낼 수 있다,는 오기였는지도 모른다.

거기다가 스스로 하늘 아래 으뜸가는 사내라고 믿음으로써 항우는 또 하늘 아래 가장 행실 바르고 아리따운[요조] 여인을 짝으로 맞는 것을 당연한 일로 기다리게 되었다. 전란으로 값싸고 헤퍼진 몸가짐과 거칠고 비천해진 심성으로 군막 부근을 어슬렁거리는 여인들은 말할 것도 없고, 항우의 세력을 보고 바치는 토호의 곱게 기른 딸들까지도 항우의 눈에는 그저 순하고 미련한 암컷으로만 보였다. 그리고 그런 항우의 자부심은 차츰 묘한 결벽으로 변해갔다.

하지만 억누를 길 없는 젊음과 넘쳐나는 기력 때문에 육욕과의 힘든 싸움을 해오는 동안 항우에게도 마음속으로 그리는 여인의 모습이 생겨났다. 그 원형은 아마도 어렸을 적에 잃어 희미해진 어머니의 기억이었을 것이다. 거기에다 숙부와 고달프게 떠돌던 소년 시절 마음 설레며 스쳐 지났던 소녀들의 모습이 항우의 상상력과 어우러져 그 무렵에는 제법 구체적인 여인상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그런데 항우는 바로 그 여인상을 우(虞)아무개의 딸이라는 소녀에게서 본 느낌이었다. 처음 그녀를 보았을 때 가슴이 철렁하고 숨이 턱 막혔던 것도 아마 그런 느낌 때문이었을는지 모른다.

“대왕께서 저 아이들을 거두어들이시는 게 어떨는지요? 이제는 곁에서 시중들 여자들을 둘 때도 되었습니다.”

언제 왔는지 진평이 등 뒤에서 항우에게 넌지시 권했다. 잠시 말문이 막힌 듯 우씨(虞氏) 성의 소녀를 멀거니 바라보고만 있는 항우의 마음속을 읽고 있는 듯했다. 그 소리에 퍼뜩 깨어난 듯 항우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아니다. 아직 천하가 어지러운데 내 어찌 계집에게 한눈팔 겨를이 있겠느냐?”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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