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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4년 4월 9일 17시 4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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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림의 시 한 편을 읽다가 새삼스레 고향의 아버지가 떠올랐다. 내 어릴 적 아버지는 가을이 되면 꼭 창호지를 새로 바르셨다. 저녁 바람에 문풍지가 바르르 떨리면, 창호지에선 가을볕에 말린 흐릿한 국화꽃 냄새가 났다. 아버지는 가을날 국화의 첫 잎을 따 창호지에 바르셨고, 그 꽃은 빛이 스며드는 종이 속에 바래어 갔다.
아버지는 밭일을 마치고 돌아오시면 창호지 앞에 앉아 발뒤꿈치 굳은살을 면도칼로 깎아 내셨다. 그리고 아버지는 창호지 한쪽에 오려붙인 작은 유리로 밖을 내다보셨다. 아버지는 그 유리를 “거울”이라고 부르곤 하셨다. 아버지에게 그 ‘거울’은 세상을 바라보는 창이었고, 국화꽃 냄새는 보잘것없는 촌로의 인생을 함축한 땀내였다.
아버지는 그 ‘거울’처럼 작고 초라하기만 한 밭뙈기를 목숨처럼 일구셨다. 더 늘 것도 줄 것도 없는 살림에는 도대체 관심이 없으셨다. 그런 아버지와 가난이 싫어 식구들은 모두 대처로 나가고 한결같이 아버지처럼 되지 않겠다는 걸 좌우명으로 삼았다. 하지만 이제 나는 신경림의 시를 읽다가 왈칵 목이 멘다.
“나는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한 일이 없다,/일생을 아들의 반면교사로 산 아버지를/가엾다고 생각한 일도 없다, 그래서 나는 늘 당당하고 떳떳했는데 문득/거울을 보다가 놀란다, 나는 간 곳이 없고/나약하고 소심해진 아버지만이 있어서,/(…)그 거울 속에는 인사동에서도 종로에서도/제대로 기 한번 못 펴고 큰소리 한번 못 치는/늙고 초라한 아버지만이 있다.”(‘아버지의 그늘’)
놀랍게도, 시인은 거울을 보며 자신이 아닌 아버지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다. 평생 아버지를 증오하면서 ‘아버지처럼 안 되겠다’를 좌우명으로 삼았던 시인이 어느새 “기 한번 못 펴고 큰 소리 한번 못 치는” 바로 그 아버지가 돼 있는 것이다.
어린 시절, 나는 노동을 끝내고 창호지 앞에서 면도칼로 발뒤꿈치를 깎는 아버지 등 뒤에 엎드려 도시로 간 형에게 몽당연필로 편지를 썼다. 어서 빨리 여기서 나를 데려가 달라고. 끝내 도시로 건너온 나는 한번도 아버지처럼 작은 유리로 세상을 바라보지 않겠다고 작심하며 살았다. 아버지가 그 ‘거울’을 보며 도시로 나간 자식들을 기다린다는 생각은 해 보지도 않았다.
나처럼 많은 우리 시대의 자식들이 저마다 자기 얼굴에서 ‘아버지’를 알아보지 못한 채 살아간다. 커다랗게 벌린 시장(市場)의 입속에서 헤매다가 아버지를 비쳐주고, 나를 비쳐주던 거울을 어느 결엔가 깨뜨렸기 때문이다.
그 거울이 깨진지도 모르는 채 나는 신경림의 시집을 읽는다. 나는 그가 얼마나 세상의 작고 보잘것없는 것들에서 자기 자신을 똑똑하게 발견해 내는지 놀라곤 한다. 어쩌면 그의 시에는 ‘민중적 서정성’이라는 수사가 필요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의 시 하나하나가 풀꽃, 나무, 사람이 외따로 떨어져 있는 게 아니라 닮았다는 사실을 들려 주고 있다. 살 비비며 사는 넉넉함으로 들려 주고 있다.
박형준·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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