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오명철/‘궐 밖 대신(大臣)’

  • 입력 2004년 3월 4일 20시 08분


야당 대변인이 최근 잇따라 불법자금 수수 의혹이 드러나고 있는 노무현 대통령의 최측근 안희정씨를 ‘궐 밖 대신’으로 거론했다. 공식적인 자리에 있지는 않지만 실제 권력은 어느 누구도 넘볼 수 없는 ‘파워맨’이라는 뜻이다. 안씨는 노 정권 초기 대통령의 ‘왼팔’로 거론됐고, 대통령도 한때 안씨를 ‘동업자’로 인정했다. 경남 김해 봉하마을에 산다고 해 ‘봉하대군(大君)’이라고 불린 노 대통령의 형 또한 ‘궐 밖 대신’으로 거론된 바 있다.

▷앞서 무보직 상태로 DJ(김대중) 정권의 인사와 공천을 주물렀던 권노갑씨가 ‘궐 밖 대신’ 소리를 들었다. 한보사건으로 외유를 떠났던 그가 4개월 만에 돌아오자 공항에는 현역의원 30명 등 거물급 환영 인파가 몰렸다. 그가 모 대학 특수대학원 최고위과정에 등록하자 정원을 20명 늘리고도 지원자를 선별했다. 당 고문 추대설이 나와 기자들이 호칭을 거론하자 그는 “권노갑이라면 대한민국이 다 아는데 직함이 무어 그리 중요한가. 그냥 이름만 부르라”고 할 정도였다.

▷‘궐 밖 대신’은 임금에 버금가는 권세가를 지칭하는 왕조시대의 낡은 용어다. 정조대왕 초기 29세로 임금의 비서실 차장 격인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임명돼 3정승 6판서를 좌지우지할 정도로 위세를 누리다 3년 반 만에 낙마한 홍국영과 아들인 고종을 수렴청정하며 ‘운현궁의 봄’을 만끽했던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그들이다. 오늘날 대통령 뒤에 붙는 ‘복심(腹心)’ ‘분신(分身)’이란 단어와 ‘2인자’ 또는 ‘1.5인자’, ‘부(副)통령’과 ‘소(小)통령’이라는 호칭 또한 ‘궐 밖 대신’을 가리키는 음어(陰語)다.

▷엄밀히 말해 ‘궐 밖 대신’이란 통치자의 가려운 곳을 긁어 주고 은밀한 요구를 대신 맡아 처리하면서 위세를 부리는 ‘권력 하수인’에 불과하다. 이 때문에 정상적인 나라에서는 당연히 ‘궐 밖’이 아닌 ‘궐 안’에 힘이 쏠린다. 반대로 공식 라인이 아닌 비선(秘線)에 의지한 통치자의 말로는 대체로 불행했다. ‘궐 밖 대신’ 또한 훗날 위세를 능가하는 후환을 겪게 마련이다. 마키아벨리도 그래서 “훌륭한 군주는 사람을 잘 쓸 줄도 알아야 하지만 잘 버릴 줄도 알아야 한다”고 한 것이다.

오명철 논설위원 osca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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