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김근/길융화복은 맞물려 돌아간다

  • 입력 2004년 1월 24일 18시 17분


설이 되면 토정비결을 사서 한 해의 신수를 보는 것이 우리의 관습이었다. 이렇게 신수를 보는 것은 이를 꼭 믿어서라기보다는 그것이 새해에 모처럼 다잡은 마음이 해이해지지 않고 긴장케 하는 감시자 역할을 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이런 의미에서 우리 사회의 올해 신수를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싶어 나도 ‘역(易)’을 뒤적여 봤다. ‘역’이란 음양의 운동을 괘(卦)라는 기호로 추상화해서 이로부터 미래의 변화를 예견하는 것이 그 요체다. 그러나 하나의 괘로는 변화를 표현할 수 없으므로 두 개를 상호 관계시켜서 그 추이를 보여준다. 마치 하나의 사건이 그 자체로는 의미를 갖지 못하고 뒤에 오는 후행 사건에 의해 성격이 결정된다는 프로이트의 사후성의 원리처럼 말이다.

▼군사정권 3대이어 문민정권 3대▼

길흉화복은 끝없이 맞물려 돌아가는 것이니 새옹(塞翁)이 잃어버린 말(馬)에 집착하지 않은 것은 이 때문이리라. 이러한 변화의 도정에서 우리는 어디쯤 와 있는 것일까.

박정희 정권으로부터 시작된 군사정권은 전두환 정권을 거쳐 노태우 정권에서 막을 내렸고, 이어서 시작된 문민정권은 김영삼, 김대중 정권을 거쳐 오늘의 노무현 정권에 이르렀다. 참으로 공교롭게도 군사정권 3대와 문민정권 3대가 서로의 성격을 규정짓는 형상이 바로 오늘인 것이다.

이것을 ‘역’의 괘형으로 바꾸면 함(咸·r)괘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는데, 이 괘는 셋째아들을 뜻하는 간(艮·n)괘가 아래에 있고, 셋째딸을 뜻하는 태(兌·q)괘가 위에 있는 모양이다. 요즘 말로 하자면 감수성이 예민한 젊은 남녀가 서로의 ‘필’이 꽂힘을 감지하고 있다는 의미다.

또 간괘는 산을, 태괘는 못을 각각 상징하기도 하므로 함괘는 못이 산 위에 있는 모습이 된다. 따라서 메마른 산은 못의 물을 흡수하여 숲을 자라게 하고 숲은 다시 못의 물을 풍부하게 할 수 있으니, 이것이 바로 오늘이 처해 있는 변화의 길한 양상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짧은 현대사에서 화와 복을 모두 경험해 봐서 무엇이 진정 길함이고 흉함인지를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 우리 사회는 현재 갖고 있는 것은 다 버리고 새것을 찾아야만 최선인 듯 투쟁적인 개혁으로만 내닫는 느낌이다. 개혁을 투쟁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선 개혁 대상을 분명하게 분리해 적대화해야 하고, 또 그러기 위해서는 개혁 논리를 이성보다 감성에 호소해야 설득력이 제고된다. 이렇게 현실을 이분법적으로 규정하는 적대적 개혁은 일시적으로 바람을 일으켜 성공하는 것처럼 보여도 결국엔 더 강력한 적과 악을 생산해낼 뿐이다. 성경에도 더러운 귀신을 내쫓고 깨끗이 수리해 놓았더니 나중에 더 악한 귀신 일곱이 들어왔다는 비유가 있지 않던가.

비록 민주화투쟁 과정에서는 갈등 관계였다 해도 각각 3대가 지난 지금은 모든 것이 뒤섞였을 만큼 변해서 이전의 윤리만으로는 선악을 쉽게 판단하기 어렵게 됐다. 변화란 반복하는 것처럼 보여도 그렇다고 뒤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변화를 외칠 때에는 그것이 기실 복고가 아닌지 냉철하게 돌아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적대적 개혁 '더 강한 적'만들뿐▼

우리가 이전의 윤리나 감각에 젖어서 공격적이고 비타협적인 셋째딸과 셋째아들이 된다면 함괘는 그 반대 모양인 손(損·p)괘로 이어진다. 손괘는 못이 아래에 있고 산이 위에 있는 형상이므로 높은 산꼭대기와 깊은 못 밑바닥간의 차이처럼 골이 벌어지는 변화로 가게 됨을 상징한다.

변화의 길흉은 외쳐 구한다고 해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다음에 오는 사건에 의해 결정된다. 그래서 길함 가운데 흉함이 있고 흉함 가운데 길함이 있는 것이다. 삶에서 겪는 고난은 주체가 그 다음을 어떤 사건으로 잇느냐에 따라 길이 되기도 하고 흉이 되기도 한다.

마찬가지로 새해가 함괘를 이어갈지 손괘로 이어질지는 궁극적으로 우리의 선택에 달려있다. 왜냐하면 다음에 오는 후행사건은 우리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김 근 서강대 교수·중국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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