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이재호/江南 증오’ 증후군

  • 입력 2003년 11월 4일 18시 54분


‘강남 때리기’ 현상이 심각하다. 부동산 값 폭등의 주범으로 몰려 몰매를 맞더니 급기야는 강남 어린이를 납치하고 유명 아파트를 폭파하겠다는 협박편지까지 날아들었다. 강남 사는 사람들이 다 부자나 투기꾼은 아닐 텐데 우리 사회의 상대적 박탈감이 그만큼 큰 것일까.

어느 노동운동 지도자에게 일류 대학 법대에 다니는 딸이 있다. 요즘 그는 휴학하고 고시공부 중이라고 한다. 극심한 취업난 속에서 많은 대학생들이 졸업을 미룬 채 고시에 도전하는 게 추세라는데 그도 예외는 아닌 듯하다.

필자는 그와 일면식도 없지만 고시에 꼭 합격했으면 한다. 그래서 가능하면 여유 있게 살기를 원한다. 형편이 된다면 강남에 사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유학이나 해외연수도 다녀왔으면 싶다. 요즘엔 미국변호사 자격증도 하나쯤은 가져야 하니까 뉴욕이나 워싱턴에서 2, 3년 더 공부하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아버지가 이라크 파병 반대 국민운동을 주도하고 있지만 크게 신경 쓸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찬반 어느 쪽이 더 국익에 좋은지는 미국에서 판단하는 것이 더 정확할 수도 있다.

물론 아버지의 소망은 다를 수 있다. 어쩌면 아버지는 딸이 ‘참여 속의 개혁’을 위해 앞장서 주기를 바랄지도 모른다. 제도권에 들어가되 매몰되지 않고 소외계층과 언제나 함께하기를 원할 수도 있다. 노동운동 전사(戰士)로서의 아버지의 삶은 치열했다. 대형 노사분규 때면 항상 수배자가 돼 쫓겼고 여러 차례 구속 수감되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딸이 아버지의 궤적을 밟으며 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굳이 그 길을 가겠다면 말릴 일은 아니지만 어느 경우에도 아버지의 삶보다는 풍요로워야 한다고 믿는다. 아버지가 노동현장에서 투쟁하는 수많은 이유 중에는 딸의 행복도 분명히 포함돼 있을 것이다. 물론 아직도 아이들이 중고교조차 제대로 못 다니는 동료 노동자들이 적지 않은 게 현실이다. 노동운동가로서 이미 명성을 얻은 아버지와는 처지가 다를 것이다. ‘성공하기 싫은 사람 누가 있겠느냐’는 자탄에도 공감한다. 그러나 내가 힘들다고 해서 동료의 작은 성공마저 질시한다면 우리의 공동체가 뿌리박고 설 땅은 없다.

오늘의 강남이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는 사람은 없다. 강남이 매일 토해 내는 위화감 앞에서 많은 사람들이 삶을 몇 배나 더 힘들게 의식하면서 살아간다. 그렇다고 강남이 모든 불만의 원인이거나 증오의 대상일 수는 없다. 아버지는 노동운동가이지만 성공한 딸은 강남에 살 수도 있는 것이다. 그 딸이 동료 노동자들에게 적개심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가. 그럴 리는 없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역시 희망이다. 노력하면 지금보다 나아질 수 있다는 희망 앞에 적개심은 숨을 곳이 없다. 희망만 있다면 어디에 살 건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빈부격차 해소를 위한 노력도, 가진 사람들의 겸양도 필요하지만 근본은 희망이다. 그 희망은 불평등한 사회가 하루하루 평등한 구조로 나아가리라는 믿음일 수 있다. 하지만 강남이 다른 지역과 달라서는 안 된다는 식의 왜곡된 평등주의는 곤란하다. 30여년 전만 해도 강남은 배를 타고 건너야 했던 곳이 아니던가.

이재호 논설위원 leejae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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