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종합]‘4전5기’ 신화의 주인공 홍수환씨 ‘인생론’ 출간

  • 입력 2003년 10월 19일 18시 4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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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역전’이라는 말이 유행어가 되고 있는 시대. 하지만 손쉬운 역전은 없다.

넘어지고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 상대를 KO시킨 ‘4전5기’ 신화의 주인공인 전 프로복싱 챔피언 홍수환씨(53). 링을 떠난 뒤에도 치열한 역전과 반전을 거듭해온 그가 최근 자서전 격인 ‘누구에게나 한 방은 있다’(해토)를 펴냈다. 그는 진정한 인생의 ‘한 방’은 ‘인내’와 ‘희망’으로 이루어진다고 주장한다.

홍씨를 만난 것은 16일 오후. 그에게 10월 16일은 잊을 수 없는 날이다. 그는 27년 전 바로 이날 요즘 말로 ‘올인(All In·가진 것을 다 걸다)’했다가 다 잃었다.

“난 복싱을 주로 왼손만 써서 했었습니다” 홍수환씨는 오른손 등뼈가 탈골된 채 굳어져 선수생활내내 제대로 주먹을 쓰지 못하자 피나는 노력끝에 왼손펀치력을 길러 주무기로 썼다. 홍씨가 그의 책 ‘누구에게나...‘를 품에 안고 힘차게 왼손을 쥐어 보이고 있다. 원대연기자

1976년 이날 그는 인천 선인체육관에서 멕시코의 강타자 알폰소 사모라와 두 번째 대결을 했다. 이보다 2년 전 남아프리카공화국 원정경기에서 아널드 테일러를 판정으로 꺾고 세계권투협회(WBA) 밴텀급 챔피언에 올랐다가 이듬해 사모라에게 4회 KO패하며 타이틀을 잃었던 터.

홍수환은 사모라가 요구하는 재대결 대전료 10만달러(약 1억2000만원)를 마련하기 위해 그동안 번 돈은 물론 생계수단인 목욕탕까지 팔았으나 결과는 12라운드 KO패.

“삶이 나를 철저하게 외면했고, 나의 모든 노력이 배신당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는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난다. 77년 WBA 주니어 페더급 타이틀매치에서 ‘지옥에서 온 사자’ 엑토르 카라스키야(파나마)에게 4번 다운되고도 5번째 일어나 역전 KO승을 거둔 기적 같은 드라마. 바로 온 국민이 열광한 4전5기의 신화다.

그러나 영광은 길지 않았다. 그가 다시 타이틀을 잃자 예전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혹독한 비난이 쏟아졌다. 가수 옥희씨와의 염문이 터진 뒤끝이었기 때문이다. ‘국민을 배신한 챔피언’ ‘링 밖에서 KO된 홍수환’…. 상심한 그는 82년 홀연히 미국으로 떠났다.

알래스카 앵커리지에서 10년을 살았다. 밥을 굶지 않기 위해 택시운전을 했다. 그러다가 마약을 운반한다는 의심을 받아 경찰에 끌려간 일도 있었다. 다시 귀국한 게 93년. 그러나 국내에서 사업을 하려던 그는 조직폭력배와 연결돼 있다며 해결사로 몰렸다. 무죄를 입증받기까지 1년여가 걸렸다.

그동안 맺힌 게 오죽 많았을까. 그래도 그는 여기까지 말하면서 웃음과 여유를 잃지 않았다.

“나는 아직도 나 자신을 썩 괜찮은 놈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어려운 일도 많았지만 항상 희망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선수시절이나, 링을 떠난 뒤나, 그런 마음이 없었더라면 일찌감치 낙오자가 됐을 거예요.”

그가 최근 펴낸 책 ‘누구에게나 한방은 있다’의 키워드 또한 ‘희망’으로 귀결된다. 이 책에는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일화가 많이 나온다. 경기 전 술을 마시고 링에 오른 얘기, 오른손 뼈가 탈골돼 선수시절 내내 왼손잡이 아닌 왼손잡이가 돼야 했던 얘기…. 성공은 늘 절망적인 순간에서 찾아왔다. 반대로 실패는 성공의 끝에 걸려 있다가 방심한 그를 넘어뜨리곤 했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와 팬들의 환호가 모두 떠난 뒤 어떻게 살아왔을까. 그는 한국에 돌아온 뒤 “복싱 외의 다른 것으로 성공해 보자”고 마음먹었다. 그래서 택한 것이 인생강연. 94년 처음 강원 춘천시 공무원을 상대로 연단에 선 이래 그동안 한 강연만도 약 700회. 주제는 항상 ‘희망’과 ‘도전’에 관한 것이었다. 그의 ‘입심’은 복싱 못지않다.

옥희씨와도 재결합했다. 첫 부인과의 사이에 1남3녀, 옥희씨와 1남1녀를 두었다. 첫 부인에게서 난 아들 대니는 아버지의 소질을 이어받았는지 복싱선수로 나섰으나 눈을 다쳐 링을 떠났다.

경기 의왕시에 사는 홍씨는 요즘 사는 재미가 한 가지 늘었다. 바로 노래다. 하긴 동생(홍수철)이 가수 출신이고 아내 또한 가수이니 그가 노래를 못하면 오히려 이상할 게다. 최근엔 부부듀엣 앨범까지 냈다.

그래도 그는 결국 복싱인. 그는 ‘홍수환 복싱 도장 체인’사업을 구상하고 있다. 그래서 침체에 빠진 복싱계에 활력을 불어넣겠다는 게 그의 꿈이다.

4시간여의 인터뷰가 끝난 뒤 자리를 털고 일어나면서 그가 툭 던진 한마디. “복싱에는 백스텝이 있지만 인생에는 백스텝이 없습니다.”

그렇다. 링 위에서야 공격을 받으면 백스텝으로 위기를 모면할 수 있지만 인생의 시간엔 백스텝이 없다. 복서 출신다운 절묘한 비유다.

이원홍기자 bluesky@donga.com

▼홍수환 약력

△1950년 서울 출생

△1974년 WBA밴텀급 챔피언. 아놀드 테일러(남아공)에 15회 판정승.

△1975년 2차방어 실패. 알폰소 사모라(멕시코)에게 4회 KO패.

△1977년 WBA주니어페더급 챔피언 획득. 엑토르 카라스키야(파나마)에게 4번 다운되고 5번째 일어나 3회 KO승.

△1978년 2차방어 실패. 리카르도 카르도나(콜롬비아)에게 12회 TKO패.

△1980년 은퇴. 총 50전41승4무5패(14KO)

△1982년 도미. 93년 귀국.

△1992년 한국권투인협회 부회장.

△1994년 인생경영에 관한 기업체 및 공무원대상 강의 시작.

△2002년 공군사관학교 복싱교관.

△현재 경인방송 복싱해설위원.

이원홍기자 bluesk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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