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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3년 10월 10일 18시 0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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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건 국무총리(가운데)의 초청으로 1일 총리공관에 모인 4당 총무들. 대화아카데미의 ‘삶의 정치 콜로키움’에 참여했던 9명의 필자들은 한국사회에서 진정한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소통의 양식’을 모색했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는 조선 전기의 문신인 점필재 김종직(점畢齋 金宗直·1431∼1492)이 창경궁 뒷산에 새로 세운 환취정(環翠亭)을 보고 쓴 글이 있다. 그는 이 글에서 옛날 중국 송나라 때 효종이 취한당(翠寒堂)을 궁중 안에 짓고 신하들을 불러 세상 이야기를 들으며 정사를 돌봤던 일을 전해 준다.
“효종은 평소 잔치를 벌이며 풍악과 여색을 좇거나 궁궐 정원에서 한가하게 노닐기를 즐긴 적이 없었다. 그는 취한당을 세우고도 안일함을 꾀하지 않고 재상들을 불러 정사를 물으며 옹폐(擁蔽·덮어 가림)의 해를 방지했으니 그 아름다운 기풍과 법도가 지금토록 역사에 빛난다.”
김종직 자신이 모시던 임금도 환취정에서 이와 같이 인정(仁政)을 펼치기를 기원한 글이었다. 김홍우 서울대 교수(정치학)는 이 책에서 이 이야기를 인용하며 인정의 핵심은 “‘옹폐’의 해를 방지하고 정치행위자들간에 원활한 의사소통을 하는 데 있다”고 말한다.
김 교수는 이 책에서 ‘소통의 정치’와 ‘권력 정치’의 차이점을 이렇게 정리했다. 소통의 정치는 서로 연결된 다수의 ‘강한 개인’을 생산하는 강한 정치로 소통을 통해 ‘공동의지의 형성’을 지향한다. 이에 반해 권력 정치는 소수의 힘있는 자에게 의존하는 약하고 소외된 개인들의 정치로 강제력에 의해 ‘타자의 의지의 도구화’를 목표로 한다. 이런 점에서 “소통의 정치는 힘은 없지만 강한 데 비해 권력 정치는 힘은 있지만 약한 정치”라고 지적한다.
필자 9명의 글을 모은 이 책은 대화문화아카데미에서 1990년대 중반부터 계속해 온 ‘삶의 정치 콜로키움’의 성과를 모은 것이다. 그 성과는 이미 2권의 단행본 ‘주민자치, 삶의 정치’(1995), ‘삶의 정치:통치에서 자치로’(1998)를 통해 정치에 대한 진지한 시각을 보여주었다. 이번에 출간된 책은 1998년 3월∼2002년 12월 발표 토론된 글 중에서 뽑아 수정 보완한 것들이다.
‘삶의 정치 콜로키움’은 이 책의 서문에서 자신들이 추구해 온 방향을 이렇게 정리했다.
“최대의 관심사는 우리의 정치현실이 직면한 소통의 양식이 과연 우리의 정치를 긍정적으로 유도할 것이냐 그렇지 않느냐에 집중됐고, 그것이 우리의 정치현실을 부정적인 방향으로 이끌 경우 이를 정당한 방향으로 유도할 소통의 양식이 무엇일까를 추구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한국사회에서 진정한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소통의 양식을 찾았고, 이 책에 실린 글들은 각 필자들이 이런 문제의식에 동참한 소중한 성과들이다. 박승관 서울대·교수(언론정보학)는 개인성과 시민성이 공존하는숙의(熟議·deliberative) 민주주의’의 본질을 고찰했고, 이상화 이화여대 교수(철학)는 세계화의 흐름 속에서 다원주의적 논의의 가능성을 제시했다.
윤선구 선임연구원(서울대 철학사상연구소)은 한국사회가 아직 민주주의와 자유시장 경제제도조차 성숙시키지 못한 비근대적 사회임을 지적했고, 김재원 동아대 교수(법학)는 서구의 배심제도가 법 전문가와 시민 사이에 대화의 장을 마련해 법문화 발전에 기여해 온 점에 주목했다. 엘리트 관료제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사회적 불평등 해소의 길을 모색한 정문길 고려대 교수(행정학)의 논지 또한 한국사회의 상황을 잘 반영하고 있다. 마지막에는 새만금 사업, 의약분업, 교육정책 등 당사자들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됐던 주요 국가정책 결정과정을 검토했다.
김형찬기자 철학박사 kh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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