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8월의저편 437…낙원에서(15)

  • 입력 2003년 10월 9일 17시 4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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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미코는 이불 밑을 더듬어 깡통따개를 찾아 오른손에는 귤 통조림을, 왼손에는 깡통따개를 들고 복도를 걸었다. 다들 자고 있다, 묵고 가는 장교도 잠들었을지 모르니까 조용조용 가야지…나미코는 ‘휴가’란 팻말이 걸려 있는 2번 문을 살며시 열었다.

고하나는 자리에 누워 있었지만 눈은 가늘게 뜨고 있었다.

나미코는 베갯머리에 앉았다.

“언니, 괜찮아?”

나미코는 곱은 두 손으로 나미코의 손을 감싸 쥐고, 왼손 약지에서 빠질 듯 헐렁거리는 쌍가락지를 바짝 올려주었다.

언니의 태아는 부추 뿌리즙을 짜 마셨는데도 떨어지지 않았다. 일주일 전 아침이었다. 나무문을 열자 잠옷은 이미 피에 푹 젖어 있고, 언니는 사타구니를 핥는 고양이 같은 자세로 아기의 다리를 한참 잡아당기는 중이었다. 아이가 거꾸로 들어앉아 있었던 것이다. 군의를 불러오겠다고 하자 부르지 말라고 했다. 고하나 언니는 양 옆방에서 자고 있는 언니들과 장교들을 깨우지 않으려고 신음 소리 하나 내지 않고 힘을 주었다. 엉덩이가 나오고, 만세를 부르는 꼴로 팔과 어깨가 나오고, 마지막으로 나온 머리는 푸르죽죽한 포도색이었다. 그냥 봐도 죽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탯줄을 잡아당겼다, 도중에 끊어지지 않도록 조심 조심, 천천히 천천히…언니는 정신을 잃었다. 시뻘건 손에 맨발로 밖으로 뛰쳐나갔다.

이토 군의는 크레졸 비누액으로 소독한 손을 질 안으로 집어넣어 태반을 꺼내고는 성가시다는 듯 거즈를 쑤셔 넣고 한숨을 쉬었다. 왜 사산을 한 거죠, 라고 묻자, 매독 때문이지, 라고 대답하고는, 내 전문은 외과인데 차례가 돌아와서 할 수 없이 봐주는 거야, 라고 투덜거리면서 나무문을 밀고 나갔다.

“언니, 귤 먹을래?”

고하나는 처음 만났을 때처럼 깊은 물 속 바위의 갈라진 틈새 같이 길쭉한 눈을 경대로 향하고, 손을 내밀면서 조그만 원을 그렸다.

경대 위에는 퍼렇게 곰팡이 낀 주먹밥과 하얀 가루가 흩어져 있었다. 배가 붓고 아픈 것을 견딜 수가 없어, 청소하러 오는 중국인 부부에게 아편을 산 것이다.

나미코는 손거울에 아편을 덜어 집게손가락에 가루를 찍어서 시퍼런 혀에 묻혀 주었다.

“언니, 즙이라도 좀 마셔야지. 아무 것도 안 먹으면 몸이 어떻게 견뎌.”

나미코는 통조림 뚜껑을 따서 숟가락으로 즙을 떠 고하나의 입에 흘려 넣었다.

글 유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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