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에 만나는 시]이재무, '모닥불'

  • 입력 2003년 10월 7일 19시 2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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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진 이슬이 내리는

늦은 밤 변두리 공터에는

세상 구르다 천덕꾸러기 된

갖은 슬픔이 모여 웅성웅성 타고 있다

서로의 몸 으스러지게 껴안고

완전한 소멸 꿈꾸는 몸짓,

하늘로 높게 불꽃 피워 올리고 있다

슬픔이 크게 출렁일 때마다

한 뭉텅이씩 잘려나가는 어둠

노동 끝낸 거친 손들이

상처에 상처 포개며

쓸쓸히 웃고 있다

- 시집 '위대한 식사'(세계사) 중에서

누군가의 한때를 빛내 주던 것들이었으리. 부서진 문갑, 장롱 문짝, 책상 서랍, 벙어리 장갑, 굽 없는 구두 한 짝, 아기곰 인형, 찢긴 그림 일기장까지 멋대로 뒹굴다 한 자리에 모였다. 주인은 없고 추억의 물증들만 남았다. 말이 좋아 '살진 이슬'이지 발길에 채이는 풍찬노숙(風餐露宿)의 나날들 모여 길 떠난다.

석유 한 통, 아니 슬픔 한 줌이 저렇게 마딜 줄 몰랐다. 인부 하나가 치익- 젖은 성냥을 긋자 저마다의 내력이 심지가 되어 타오른다. 여럿이 타지만 불꽃은 하나. 그래서 모닥불인가. 더러 목메는 연기와 눈 매운 그을음도 있지만, 살아서 마지막을 춤추며 가노라고 '서로의 몸 으스러지게 껴안고' 하늘로 치솟는다.

제 몸 제가 사루어 가는 길이건만 저 천덕꾸러기들, 아직도 어둠 속에 남아 있을 상처 입은 손들을 위해 저마다 어둠 한 뭉텅이씩 지우며 간다. 좀더 남아서 누군가의 삶을 빛내주고 오라고. 삶과 영혼의 모든 건축은 상처 위에 세우는 것이라고, 어제부터 부쩍 입김 서리는 초가을 공터에선 지금도 활활.

반칠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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