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8월의저편 412…낙원으로(29)

  • 입력 2003년 9월 5일 17시 5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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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는 벌써 다 떨어졌는데 낙원 밖에서는 치치치치치, 삐-삐- 새가 울고, 아직 잎은 떨어지지 않았는데 사륵사륵사륵, 푸스스스스 마른 잎이 휘날리는 듯한 바람소리가 난다.

낙원 안에서는 남자와 여자가 뒤엉켰다가는 스러지고, 뒤엉켰다가는 스러지고. 으윽, 아아, 아아아아아, 아아아아아, 잠옷차림의 나미코는 두 손으로 귀를 막고 벽에 걸려 있는 죽은 위안부의 치마저고리를 올려다보았다.

저 사람은 사유리라는 이름으로 죽었다. 아무도 진짜 이름을 몰랐다, 꾐에 넘어가 이런 일을 했으니, 진짜 이름을 어떻게 말할 수 있었으리. 아버지, 어머니, 오빠, 경순, 혜자, 우근씨, 매화반 고바야시 선생님, 누구의 이름도 입 밖에 내서는 안 된다. 밀양에서 왔다는 말도 해서는 안 되는 거였다. 나는 나미코. 나도 사유리처럼 나미코란 이름으로 죽는 수밖에 없다…아아, 생각났다, 우근씨의 여동생 소원이가 밀양강에 빠져죽었을 때, 할매가 그랬다. 물에 빠지는 꿈은 재난을 당할 징조, 물에 떠내려가는 꿈은 죽을 징조라고. 아이고, 그 아이도 무슨 꿈을 꿨을 텐데, 왜 몰랐을까…나는 기차 속에서 몇 번이나 물에 빠지는 꿈을 꿨다… 이렇게 될 줄 알았더라면… 기차에서 뛰어내리는 건데, 봉천호 갑판에서 바다로 뛰어드는 건데, 대길호에서 양쯔강으로 뛰어드는 건데, 그랬어야 했는데… 아랑은 처녀 몸으로 죽었을까, 아니면 그 짓을 당한 후에… 전설에는 정절을 지키고 살해당했다고 돼 있는데, 칼을 든 남자에게 저항할 수 있을까? 아름다운 봄날의 밤, 그 아름다움에 젖어 있는 아랑의 등 뒤로 발소리가 다가온다. 돌아보자 유모의 모습은 없고,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주기는 뜻을 이루려고 도망가는 아랑을 쓰러뜨리고 저고리 고름을 풀고 치마에 손을 댔다. 아랑이 죽을힘을 다해 저항하자, 화가 난 주기는 칼을 뽑아 들고 목을 찔렀다. 대나무숲에 묻히는 아랑을 본 것은 달뿐이었다. 아버지는 자살을 시도하면 군대에 딸려서 전선으로 보낸다고 겁을 줬지만, 목을 매달면 틀림없이 죽을 것이다. 저 철창에 무슨 새끼줄 같은, 절대로 끊어지지 않을 끈을 걸고… 하지만 내 키로는 닿지 않을 것 같다, 새벽에 식당 의자를 들고 와서…그렇지, 허리띠가 좋겠어….

총검과 장화가 스치는 소리가 다가오고, 나무문이 열렸다. 모포가 들려 올려지는 순간, 나미코의 목구멍에서 소리가 튀어나왔다.

어서 오세요, 그 쪽에 앉으세요.

글 유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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