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8월의 저편 350…아메 아메 후레 후레(26)

  • 입력 2003년 6월 24일 18시 2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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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천? 봉천? 지리 시간에 고바야시 선생님이 지도를 보여준 적이 있다. 밀양에서 몇 센티미터 위였더라? 지도상으로는 시모노세키보다 훨씬 더 먼 것 같은 느낌이다. 부산 같으면 오빠도 몇 번이나 다녀온 적이 있고, 시모노세키 얘기도 고바야시 선생님한테 들은 적이 있지만 봉천은, 삐익 삐, 치 치 칙 칙 칙 칙, 기차는 터널에서 빠져나왔는데 소녀는 긴 긴 터널로 헤매는 듯한 기분이었다. 캄캄한 머리 속으로 고독감과 함께 가족과 친구들의 얼굴이 번졌다. 엄마, 오빠, 경순이, 혜자, 교동 고모, 가곡동 삼촌, 사촌 지혜와 연이, 한방 약국 이모, 쌀가게 김 아저씨, 아아, 우근씨, 아아, 나는 고향을 떠나 낯선 땅 낯선 사람들 속에 묻히려 하고 있다. 어쩌면 돌이킬 수 없는 짓을 저지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대구에서 내리겠다고 하면 이 아저씨, 화낼까? 화내겠지, 그럼 어쩌지.

“복숭아라도 하나 먹지 그러느냐” 남자는 소녀의 불안을 꿰뚫어본 것처럼 말했다.

“고맙습니다”

소녀는 손톱으로 복숭아 껍질을 벗겼다. 과즙이 턱을 타고 흘러 치마에 떨어졌다. 치마 따위야 더러워지든 아무 상관없다, 지금은 무언가에 열중하고 싶다, 먹는 것에. 소녀는 남자가 절반도 먹기 전에 복숭아 하나를 다 먹어치우고 씨에 붙어 있는 살을 핥고는 손바닥에 씨를 뱉어냈다.

“처녀티가 나야 할 텐데 먹성만 좋구나”

“구니모토 우테쓰란 사람 알아요?”

“뭐? 갑자기 무슨 엉뚱한 얘기냐?”

“5천하고 1만에서 조선에서 제일 빠르다고, 선생님이 그러던데요”

“육상 선수냐, 하기야 조선은 육상이 세니까. 손 기테이(孫基禎)와 난쇼료(南昇龍)는 일본의 자랑이지. 둘이 표창대에 오르고 두 번이나 울려퍼지는 기미가요(일본국가)를 들었을 때는 눈시울이 다 뜨거워지더구나”

“구니모토 우테쓰도 유명해요. 아사히 신문에도 실렸었는데. 고바야시 선생님이 밀양보통학교의 자랑이라고, 신문 오려서 칠판에 붙여놓고 몇 번이나 읽어줬어요. 조선 대만은 관동에 밀려서 잘해야 관동을 뒤따라갈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구니모토 군의 초인적인 활약으로 관동을 물리쳤다고요”

“역전 달리기 말이로구나”

“다섯 사람이나 제쳤어요. 전쟁 때문에 도쿄올림픽이 중지만 안 됐어도 출전했을 거예요. 그래도 런던올림픽에는 동생이 출전할 거예요”

글 유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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