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심규선/700만원 '술 한잔' 정치

  • 입력 2003년 5월 25일 18시 2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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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일 저녁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을 만나고 나온 3당 대표들이 초호화 룸살롱으로 직행한 것은 ‘약속’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이날 룸살롱 회동의 전말을 알 만한 사람들의 말을 종합해 보면 이렇다.

“청와대 만찬이 있기 전 대기실에서 기다리던 중 민주당 정대철 대표가 ‘지난번 청남대 회동에서 (제가) 술 한잔 사겠다고 했습니다’라고 상기시켰다. 만찬이 끝난 뒤 자민련 김종필 총재가 정 대표에게 ‘술 산다고 했지. 그러면 지금 사’라고 했다. 정 대표와 한나라당 박희태 대표는 JP 차에 동승해 (어디인지도 모르고) J룸살롱으로 가게 된 것이다.”

약속을 요란스럽게 지킨 것도 문제지만, 이런 사실이 알려진 뒤에 보여준 당사자들의 태도는 더욱 실망스럽다. 정 대표와 박 대표는 JP를 따라 간 죄밖에 없다고 생각해서인지 대뜸 억울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술 좀 마신 것 가지고 신문에서 그런 것을 쓰고 그러나.”(정대철 대표)

“술 한잔 한 걸 가지고 뭘 그래쌌는지….”(박희태 대표)

JP의 직접적인 반응은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한 당직자는 “JP는 모처럼 분위기 좋게 대화의 정치, 타협의 정치, 만남의 정치를 위해 자리를 가진 것인데 그렇게 돼 아쉽다는 심정을 피력했다”고 말했다. JP의 해명에서도 ‘동기의 순수성’은 알아주지 않고, 비난만 한다는 ‘불만’이 읽힌다.

그러나 불만으로 치자면 국민들의 불만이 더 했을 것이다.

“제발 정신 좀 차려라. 참으로 한심한 노릇이다. 그렇게 쓸 돈 있으면 어디 보육원에라도 방문해서 라면 몇 박스라도 기부 좀 해라…세계 경제도 어렵고 우리나라는 지금 더 어렵다…여보슈 정치인들! 우리 서민은 개혁을 하려고 해도 힘이 없어 못하오. 힘 있는 양반들 제발 엉뚱한 데 힘쓰지 말고 진정으로 국민들 위해 힘 좀 써라.”(아이디 sjsungfv)

공무원들은 더욱 분개했다. 이들에게는 19일부터 ‘새로운 윤리강령’에 따르라는 엄명이 떨어졌다. 부처별로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한마디로 ‘가려서 사람 만나고, 만나더라도 비싼 밥 먹지 말라’는 것이다. 그런데 3당 대표들은 이를 비웃듯 하룻밤 술값으로 700여만원이나 써버리다니, 도저히 참으려야 참을 수가 없다는 것이 공무원들의 심정이었을 것이다.

각당 내부에서도 비판이 주류를 이루고 있지만 일부에서는 반론도 나온다. ‘양주는 갖고 간 것이다’ ‘술값은 그렇게 많이 안 나왔다’ ‘있는 사람이 써야 소비 진작도 되는 것 아니냐’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들이 설득력이 있을 것으로 믿는다면 정말로 오산이다.

조금 과장해서 한국인 4500만명 모두가 갖고 있는 자격증이 두 개가 있다는 말이 있다. 하나는 ‘정치분석가’이고, 또 하나는 ‘교육평론가’이다. 그만큼 우리 국민들의 정치와 교육에 대한 관심이 높다는 뜻이다.

교육에 대한 관심은 그렇다 치더라도, 정치는 이제 ‘관심’이라는 중립적인 용어조차 쓰기가 힘들어졌다. 정치가 비판과 냉소의 대상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요즘 신문사에는 예전에 그렇게 자주 걸려오던 정치권에 대한 성토 전화도 거의 없다. 인터넷이 발달해 온라인상에서 불만을 토로하는 경우가 많아졌기 때문이라는 말도 있다. 하지만 인터넷을 제대로 사용할 줄 모르는 중년이나 노년층의 전화도 거의 없는 것을 보면 아무래도 정치에 대한 무관심이 확산되고 있다는 분석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정치와 정치인에 대한 관심과 신뢰를 되돌릴 수는 없을까. 쓸데없는 약속을 지키려고 애쓸 것이 아니라 지켜야 할 약속, 지킬 만한 약속은 반드시 지키는 것이 지름길이다.

심규선 정치부장 kssh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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