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 卷二. 바람아 불어라

  • 입력 2003년 3월 27일 18시 5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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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불(周불)이라고? 아니 주불이 어째서 풍읍(豊邑)까지 쳐들어 왔다는 것이냐?”

패공 유방이 놀라움을 감추고 조용히 물었다.

“위왕(魏王)을 위해서일 겁니다. 진왕(陳王)이 장함에게 쫓겨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게 되자 딴마음을 먹은 위왕을 위해 위나라의 세력을 넓히려 함이겠지요. 그래서 동쪽으로 오다 보니 풍읍까지 이르게 되었을 것입니다.”

오랜 친구에서 막하의 빈객(賓客)이 되어 패공의 참모 노릇을 하고 있는 노관이 곁에 있다가 그렇게 추측했다.

“옹치(雍齒)는 왜 한번 싸워보지도 않고 주불(周불)에게 항복했는가?”

패공 유방은 짐작 가는 데가 전혀 없는 것이 아니었으나 다시 그렇게 물어보았다. 소식을 가지고 달려온 젊은이가 분한 듯 일러바쳤다.

“그자는 평소에도 패공 아래로 든 일을 늘 달갑지 않게 여겨왔습니다. 아뢰기 죄송스러운 말이나 한번은 패공의 뒷모습을 가리키며, 머리는 텅 빈 허풍선이가 운 하나는 억세게 좋아서 남 위에 올라타게 된 꼴이라고 큰소리로 지껄이기까지 했습니다. 그런 자에게 풍읍을 맡기셨으니 고양이에게 생선가게를 맡긴 것이나 다름없지요. 주불이 사자를 시켜 글 한 통을 보내자 바로 성문을 열고 그 앞에 꿇어 엎드려 버렸습니다.”

“주불이 무어라고 썼다던가?”

“풍읍은 예전에 위왕(魏王)께서 도읍지로 삼으셨던 곳이오. 이제 위나라가 싸워 되찾은 성만 해도 수십개에 이르니 만약 그대가 항복하면 제후로 삼아 풍읍을 지키게 할 것이나 거역하면 풍읍을 들이쳐 옥과 돌을 가리지 않고 모두 태워버릴[옥석구분] 것이오-대강 그렇게 쓰여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이문열 신작장편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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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까지 듣고 나니 나머지는 뻔했다. 패공이 두려워했던 대로 옹치는 최소한의 구실과 갈 곳이 생기기 바쁘게 패공에게서 등을 돌려버리고 말았다.

그러자 지난날의 불쾌한 기억들이 한꺼번에 떠올랐다. 모든 사람이 패공의 신화(神話)를 믿고 다투어 그 밑으로 들어올 때에도 옹치는 언제나 차가운 웃음과 빈정거림의 눈길로 겉돌기만 했다. 그뿐만 아니라 때로는 나름으로 한 무리 졸개들을 만들어 패공에게 맞서려 들기까지 했다. 지난번 패현을 뒤엎을 때도 옹치는 요리조리 살피다가 막판에야 마지못한 듯 끼어들어 패공의 속을 긁어댔다.

하지만 그날 패공의 마음을 더욱 괴롭힌 것은 그런 옹치를 따라간 풍읍 젊은이들이었다. 같은 땅에 나고 자란 젊은이들이 끝내 자신을 저버리고 옹치같이 하찮은 작자를 따라 가버렸다는 게 패공의 가슴에 깊은 상처를 주었다.

“모두 모아들여라! 지금 당장 풍읍으로 간다.”

언제나 느긋하던 패공이 불같이 노해 그렇게 소리쳤다. 그리고는 오랜만에 창칼을 뉘여 놓고 쉬고 있던 장졸들을 질풍같이 휘몰아 풍읍으로 달려갔다.

방여에서 풍읍까지가 그리 가까운 길이 아니었고, 더구나 날이 이미 저문 데다 진눈깨비까지 날리고 있었다. 그러나 패공이 워낙 급히 군사를 몰아대니 다음날 날샐 무렵에는 풍읍 성밖에 이를 수가 있었다. 그때까지 말없이 패공의 눈치만 보며 따르던 조참이 가만히 달래듯 말했다.

“먼길을 달려와 지친 군사로 급하게 싸워서는 안 됩니다. 아침밥을 배불리 지어 먹이고 한나절 쉬게 한 뒤에 성을 들이치는 게 어떻겠습니까?”

“우리 군사는 이미 방여에서 며칠이나 잘 쉬었소. 하루 밤쯤 잠을 설쳤다고 싸우지 못할 것은 없소.”

패공이 그렇게 대답하며 싸움을 서둘렀으나 곁에 있던 소하와 노관까지 나서서 조참을 편들자 겨우 마음을 돌렸다. 잡일하는 군사들이 서둘러 솥과 시루를 걸고 아침밥을 짓는 동안장졸들을 쉬게 하다가, 아침밥을 먹기 바쁘게 성을 에워싸게 했다.

“옹치는 어디 있느냐? 어서 나와 얼굴을 보여라!”

말 위에 높이 앉은 패공 유방은 성을 들이치기 전에 먼저 옹치부터 불러냈다. 옹치가 표정 없는 얼굴을 성벽 위로 드러내고 차갑게 물었다.

“유계는 무슨 일로 나를 찾는가?”

새로 생긴 호칭은 두고 굳이 건달시절에 이름 대신 쓰던 자(字)를 부르는 것부터가 사람의 심기를 건드는 데가 있었다. 유방이 참지 못하고 호통을 쳤다.

“옹치 이놈. 나는 너를 믿고 풍읍을 맡겼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나를 저버리고 주불에게 무릎을 꿇었느냐?”

“나는 네가 그저 머리가 빈 장돌뱅이로만 알았는데 이제 보니 머리가 아주 돈 미치광이로구나. 너를 저버리다니, 그럼 네가 내 주인이라도 된단 말이냐? 그리고 이 땅은 원래 위나라의 땅이었다. 이제 위왕(魏王)께서 다시 일어나시어 옛 땅을 찾고자 하시는데 어찌 감히 거역할 수 있겠느냐?”

그러면서 패공 유방을 내려보는 품이 마치 철없는 어린아이 보듯 했다. 유방이 더욱 성나 목소리를 높였다.

"나는 패현 부로(父老)들의 명을 받들어 패공이 되고, 너를 수하에 거두어들인 뒤에 풍읍의 수장(守將)으로 삼았다. 그런데 너는 힘을 다해 풍읍을 지키기는커녕 싸움 한번 없이 적에게 갖다 바쳤으니 이 또한 반역이다. 그러고도 네 목이 성하기를 바라느냐?”

“찢어진 입이라고 함부로 지껄인다만 진정으로 반역을 하고 있는 것은 바로 너다. 너는 포악한 진나라를 쳐 없애기 위해 <장초(張楚)>를 받든다고 하면서도 정작 진왕(陳王)이 장함에게 져 쫓겨다닌다는 소문을 듣고도 군졸 한 명 진왕에게 보낸 적이 없다. 그뿐만 아니라 지금 위왕이 되신 영릉군 구(咎)는 진왕께서 허락하여 세운 왕인데, 그를 받드는 걸 반역이라고 떠드니 도대체 너는 누구냐? 네가 진나라의 이세 황제라도 된다는 말이냐?”

옹치는 주불에게 풍읍을 갖다바칠 때부터 마음먹고 준비한 것처럼 숨결 한 번 흐트러짐 없이 그렇게 패공의 부아를 돋우었다. 패공 유방이 원래 그리 차분하고 조리 있게 말할 줄 아는 사람이 못되었다. 거기다가 화까지 터질 듯 치솟으니 더욱 말문이 막혔다. 한참이나 옹치를 노려보다가 갑자기 좌우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모두들 무얼 하느냐? 인정사정 볼 것 없이 어서 성을 들이쳐라! 먼저 성벽을 오르는 자에게는 오대부(五大夫)의 작위를 줄 것이오, 저 옹치 놈을 사로잡아오면 천금을 상으로 내릴 것이다!”

그리고는 자신도 칼을 빼들고 성벽을 기어오를 기세였다. 소하가 간신히 패공을 말려 잡아두고 있는 사이에 장졸들이 함성과 함께 성을 들이치기 시작했다.

몇 달째 줄곧 이겨온 군사들이라 처음 내달을 때의 기세는 좋았다. 하지만 밤새도록 진눈깨비 속을 행군해온 것이 아무래도 무리가 되었는지 몸이 기세를 따라주지 않았다. 성벽에 이르자 어딘가 이전 같지 않게 굼뜨고 둔해진 듯한 데가 있었다.

이전과 다르기는 앞장선 장수들도 마찬가지였다. 번쾌 하후영 주발 관영 등이 저마다 손에 익은 병장기를 휘두르며 성벽을 기어올랐으나 왠지 머뭇거리고 움찔거리는 기색이 있었다. 지키고 있는 군사들이 모두 같은 땅에 오래 함께 산 사람들이라 모질게 손을 쓰지 못하는 것 같았다.

거기다가 옹치가 마음먹고 준비한 것은 말만이 아니었다. 농성전(籠城戰)에 요긴하게 쓰일 것은 무엇이든 더미더미 성벽 위에 쌓아놓고 기다리다가 성을 기어오르는 패공의 군사들의 머리 위에 퍼부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는 화살로 메뚜기떼처럼 거멓게 하늘을 덮더니성벽으로 다가가자 이번에는 돌과 통나무가 우박처럼 쏟아졌다. 긴 장대가 성벽에 걸친 구름사다리[雲梯]를 밀어내고, 어렵사리 구름사다리를 기어오른 군사들의 머리 위에는 다시 끓는 물과 기름이 퍼부어졌다.

군사들로서는 패현을 떠난 뒤로 처음 겪는 모질고도 힘든 싸움이요, 성이 나서 제 정신이 아닌 유방이 보기에도 무리하기 짝이 없는 공성(攻城)이었다. 곳곳에서 비명소리와 함께 군사들이 상하는 걸 보자 퍼뜩 정신이 든 유방은 징을 치게 해 군사를 거두었다. 하지만 치솟는 화를 풀 길이 없어 성벽 위를 바라보며 저잣거리 잡놈들이나 날건달이 쓰는 육두문자를 거침없이 뱉어냈다.

그날 오후 패공 유방은 보다 많은 구름사다리를 얽고 나무 방패를 짠 뒤에 다시 한번 풍읍 성을 들이쳤다. 하지만 아침나절보다 군사들이 좀 덜 상했을 뿐, 성벽에는 여전히 아무도 올라가 보지 못했다. 그날 밤 어둠을 틈탄 기습도 마찬가지였다. 구름사다리를 성벽에 걸치기도 전에 성벽 위가 대낮같이 밝아지며 화살과 돌이 우박처럼 쏟아졌다.

그 뒤로도 유방은 사흘이나 더 풍읍을 에워싸고 성을 떨어뜨리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만큼 미움과 분노가 컸음을 보여주는 셈인데 일은 감정대로 되지 않았다. 옹치의 준비는 치밀했고, 한 성을 맡아 지키는 우두머리로서의 자질도 모자람이 없었다. 거기다가 성 밖에서 치고 드는 기세가 맹렬할수록 성안에서 지키는 사람들의 위기감도 높아져, 옹치와 풍읍 젊은이들을 전보다 더 굳게 뭉치게 했다. 그런 그들이 지키는 성이다 보니 힘을 들여 칠수록 패공 쪽의 군사들만 더 많이 죽거나 다쳤다.

하지만 패공 유방은 어찌된 셈인지 옹치와 풍읍을 쉽게 단념하지 못했다. 나흘째 되는 날 아침 유방은 셋에 하나꼴은 죽거나 다친 장졸들을 이끌고 다시 성 앞으로 밀고 들었다. 문루(門樓)에서 내려보고 있던 옹치가 유방을 보고 큰 소리로 이죽거렸다.

“유계, 너는 원래 노름방 뒷전에서 공술이나 얻어 마시거나, 패거리를 지어 좀도둑질이나 하던 저자 밑바닥 망나니가 아니었더냐? 꼴에 녹봉으로 살 꿈을 꿨던 듯하다만, 기껏해야 말단 벼슬아치들 수발이나 드는 정장(亭長) 노릇이 제격이었다. 그런데 어지러운 세상을 만나 허풍 하나로 패공 자리를 차지하고, 수천 군사를 거느리게 되더니 간이 배 밖으로 나오고 눈이 뒤집혀버린 모양이구나. 잇따라 나흘이나 그렇게 모진 낭패를 당하고도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했느냐? 든 것 없이 번지르르하기만 한 머리통이라도 네 어깨 위에 그대로 얹어 두려거든 이만 물러가거라.”

“저놈이…저 아비 셋 가진…천한 종놈이….”

유방이 불길이 이는 눈길로 문루를 올려보며 외마디 비명이라도 내지르는 것처럼 욕설을 퍼부었다. 벌겋게 달아오른 그의 얼굴은 건들기만 해도 요란한 소리를 내며 터져 버릴 것 같았다. 그러나 옹치는 얼굴색 한 번 변하는 법 없이 이죽거림을 계속했다.조이영기자 lyc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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