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령화 사회]<7>노인의 정치세력화

  • 입력 2003년 2월 27일 18시 39분


코멘트
《서울 마포구에 사는 양모씨(65)는 “지난 대통령선거에서 젊은 세대가 노무현(盧武鉉) 후보를 당선시켰다는 평가가 못마땅하다”고 말했다. 노 후보를 지지한 노인도 적지 않다는 게 양씨의 주장이다. 서울 송파구에 사는 전모씨(62)는 지난 대선 때 투표를 하지 않았다. 전씨는 서상록(徐相祿)씨가 노인 권익을 주장해 팬이 됐지만 중도 사퇴하는 바람에 선거에 흥미를 잃었다고 말했다. 통계청에 따르면 2000년 11월 현재 60세 이상 인구는 516만명으로 전체 국민의 11.3%에 이른다. 그러나 투표참여 인구가 다른 연령대보다 많아 역대 선거에서 전체 투표율의 14∼20%를 차지하고 있다. 이에 따라 정치권에서는 노인층을 전통적인 표밭으로 여겨 각종 노인 관련 공약을 내걸며 지지를 호소한다. 그렇지만 선거만 끝나면 언제나 다시 소외되는 게 노인이다. 최근 이런 상황에 일대 변혁이 일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노인의 권리를 스스로 찾자는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노인들이 조직을 결성해 정치세력화하고 있다.》

클릭하면 큰 이미지를 볼 수 있습니다.

▼노인정치 닻 올랐다▼

2002년 5월 출범한 노년권익보호당(노권당)은 정당 형태를 띤 첫 노인 정치조직이다. 그해 6월 13일 치러진 지방선거에 2명의 후보를 냈다. 노권당은 경제력, 질병, 고독, 실직 등을 4대 노인문제로 선정하고 이의 해결을 위해 경로연금 수혜자 대폭 확대 등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연재물 리스트로 바로가기

노권당은 2002년 12월 대선에서 서상록씨를 영입해 대선 출마를 추진했으나 무산됐다.

노권당 이달형(李達炯) 대표최고위원은 “2003년 1월 현재 당원이 2만여명에 지구당은 30개를 넘어섰다”며 “차기 총선에는 반드시 국회에 입성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2002년 6월 학자 등 30여명의 ‘의식 있는’ 노인들이 모여 발족한 노인시민연대는 노인정책의 이론적 토대를 제공하고 있다.

노인시민연대는 노인들이 힘을 합쳐 권력화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를 위해 노인들이 ‘은퇴자’가 아니라 ‘시민’으로 거듭나야 하며 스스로 뛰어들 것을 촉구하고 있다.

‘밝은 노후를 만들어 가는 사람들의 모임’은 30, 40대 학자 40여명이 중심이 된 특이한 노인단체다. 이 단체는 젊은 세대가 나서서 노인 권익을 옹호해야 한다며 경로연금 확대와 노인을 위한 재정확보를 줄기차게 요구하고 있다.

이 밖에 노년유권자연맹은 지난 대선에서 여야 대통령 후보에게 노년복지예산을 정부예산 대비 2%로 늘려줄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

▼선진국을 벤치마킹한다▼

국내 노인단체들은 주로 미국, 영국 등 선진국 사례를 연구하면서 세력을 키우고 있다. 특히 미국은퇴자협회(AARP)는 노인 정치세력의 교과서라고 할 만하다.

1958년 설립된 AARP는 노인연금 및 조세문제, 건강보험보장 등을 이슈화했던 전국은퇴교사협회(NRTA)가 모태가 됐다.

태동기부터 노인에게 불리한 사회제도에 도전했기 때문에 노인들의 전폭적인 지지가 뒤따랐다. AARP는 1년에 12달러의 회비를 내야 함에도 불구하고 2002년 현재 회원이 3500만명에 이른다.

AARP는 유급직원만 1800여명이나 된다. 전문로비스트를 고용해 정책을 관철시키며 노인 권익을 옹호하는 정당과 후보자를 고르도록 ‘유권자 교육’을 하고 있다. 인터넷 홈페이지에 각 정치인들의 노인정책을 올려 의사결정을 돕고 있다.

1988년 창립된 영국의 런던노인포럼(GLF)은 런던 지방정부나 기타 유관단체와 협상을 통해 노인정책을 수립하는 데 실질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일본 전국노인클럽연합회는 클럽 수만 13만개에 전국적으로 885만명의 회원을 두고 있는 일본 최대 노인단체다. 이 단체 간부의 상당수가 각 지방자치단체 산하 심의회 위원으로 활동하며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아직 갈 길은 멀다▼

2002년 지방선거에서 노권당의 경우 서울시 광역의원에 출마한 후보가 1340표(득표율 1.9%), 경남 남해군수에 출마한 후보가 5380표(득표율 15.6%)를 얻는 데 그쳤다. 이에 대해 전문가들은 신생 정당의 한계도 있지만 그보다는 노인 유권자의 자발적 참여가 부족하고 조직화가 덜 된 탓이라고 분석한다.

선거관련 기획을 전문으로 하는 ‘21세기 리서치 앤 시스템’ 안병도(安柄燾) 소장은 “노인의 참여를 이끌어 낼 계기가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최초의 성과가 나타나면 노인들의 조직화는 순조롭게 이뤄질 것”이라고 말했다.

젊은 세대와의 커뮤니케이션 단절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높다. 노인들이 젊은 세대와 선을 가르려는 경우가 많다는 것. 노권당 이 대표최고위원은 “노인들의 아집이 젊은 사람의 참여를 가로막을 때가 있다”고 말했다.

노인단체가 인력과 자금난이 심한 것도 문제점이다. 한 노인단체의 간사는 “혼자 모든 업무를 담당하기 때문에 힘에 부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고 털어놨다.

이 단체는 운영자금이 없어 머지않아 사무실을 빼줘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지금은 성공을 말하기보다 토대를 확실히 구축할 시기라는 의견도 많다. 노인시민연대 공동대표인 연세대 박영신 교수(사회학)는 “우리는 미래를 위해 일하고 있다. 이제 첫발을 내디뎠을 뿐이다”고 말했다.

김상훈기자 corekim@donga.com

▼전문가 기고▼

2002년 9월22일 독일에서는 제15대 독일연방하원의원 선거가 치러졌다. 여기에 참여한 정당은 총 24개에 이르렀고 ‘은발의 표범(Graue Panther)’도 그중 하나다.

당시 독일에 머물면서 선거를 지켜보던 필자의 눈에 가장 두드러져 보인 정당이 바로 ‘은발의 표범’이었다. 이름부터 독특한 이 정당은 총 13개 주에서 후보를 내고 선거에 임했다. 결과는 단 한 명도 당선되지 않는 등 참패였다. 그럼에도 그 과정에서 노인들이 대부분이었던 선거 운동원의 열정은 필자를 감동시키기에 충분했다.

이 정당은 노인을 주축으로 한 노인정당이다. 1975년 결성된 노인단체가 모태가 됐으며 1989년에 ‘노인들의 권익’을 정강정책으로 채택하며 정당으로 출범했다. 당원은 2002년 9월 현재 1만명 정도다. 당원 수를 기준으로 했을 때 전체 정당 중 9위에 오를 만큼 규모 면에서도 손색이 없다.

이 정당은 명실상부한 노인 정당이다. 하원의원 선거 당시 이 정당 후보의 평균 연령은 58.4세로 전체 후보자의 평균 연령 45.9세보다 13세가량 많았다.

이 정당이 정식 정당으로 대접받는 데에는 국회의원을 배출한 경력이 있기 때문이다. 1987∼1990년 의원을 지낸 트루데 운루라는 여성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그는 지금도 이 정당에서 핵심적인 일을 하고 있다.

이 정당은 ‘노인의 보호에 기여하는 것’을 목표로 하지만 사회 전체의 조화를 위해 당원 자격에 나이 제한을 두고 있지는 않다.

독일에서 이런 노인정당이 자리잡을 수 있었던 것은 사회 전체적으로 진정한 의미의 정당정치가 자리잡았기 때문이다. 우리의 경우 노년권익보호당이 있기는 하지만 실제 정치 풍토를 바꿔 놓을 만큼 세력화하는 것이 쉽지 않아 보인다.

따라서 현 단계에서 기존 정당들이 노인을 위한 정책개발에 힘을 기울이는 것이 더 바람직할 수도 있다. 이런 차원에서 각 정당에서 노인을 위한 부서를 마련하고 일정 비율 이상의 노인 당원을 확보하는 데 힘을 기울이는 것도 대안이 되지 않을까 싶다.

은희경 독일 함부르크대 사회복지전공 박사과정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