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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3년 1월 10일 18시 5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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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현 글 그림/268쪽/늘푸른소나무/8500원
열두 살 나이에 시장 서점에 들렀다가 고흐의 화집을 만나 화가의 꿈을 꾸기 시작한다. 그 꿈을 꾼 지 40년 만에, 나이 쉰이 넘어 첫 전시회를 열었다. 그림마저 하나의 상품으로 보는 세상이지만 그는 자신의 그림을 팔지 않는다. 언젠가 자신의 작품이 한자리에 다 모여 그림끼리 대화하면서 살게 하고 싶다는 바람이 있어서다. 그림을 팔지 않는 대신 삽화나 표지화 같은 것으로 생활비를 벌어야 했고, 웬만한 거리는 걸어다니며 살았다.

무명 화가의 삶을 거쳐오면서도 화가로서의 자부심과 자긍심을 지켜온 그의 이름은 한인현(72). 전쟁통에 홀홀 단신 월남한 뒤, 고흐 못지않은 화가가 되기 위해 갖은 고생을 겪으며 약삭빠른 세상에 백기 들지 않고 꿋꿋이 살아온 노화가이다.
이 책은 그가 살아온 이야기와 예술세계를 고백하듯이 솔직하게 담아낸 산문집이다. 그의 그림을 닮은 듯, 기교 부리지 않고 절제된 언어로 엮어낸 글들이 화가의 스케치와 어우러져 편안하고 정겹게 읽힌다.
함경남도 함주군 흥상 바닷가 마을에서 태어난 그는 의사가 되라는 부모의 권유를 뿌리치고 남북한 통틀어 처음으로 생긴 예술학교(흥남문화학원과 해주예술학교)를 다녔다. 그 이후 지금까지 그는 세상이 변화하는 속도에 맞추지 않고, 어떤 고통과 유혹에도 절대로 짓밟히지 않겠다는 자기 삶의 원칙대로 살아왔다. 멀고 험한 길을 가는 사람, 시선을 먼 하늘에 고정시킨 사람 등의 그림을 보면 월남 이후 화가로서 자리잡기까지 가난과 설움을 불편해하지 않으며 그가 견뎌왔던 세월을 떠올리게 한다.
각박한 사회와 더불어 사나워지지 않으면 살아남기 힘든 세상. 그 세상의 질서라는 것이 어떤 건지 그는 도무지 헤아릴 수 없었다. 가난한 화가의 등을 치는 사람들도 있었다. 잡지사에 가서는 점심값이 없어 끼니를 걸렀으면서도 밥 먹고 왔다고 거짓말을 한 적도 있다.
나이 70이 돼서야 그를 아끼는 사람의 도움을 받아 고흐의 무덤을 찾아갈 수 있었다. ‘스승’의 무덤 앞에서 그는 당당했다.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지켜낸 외길 화가의 삶에 스스로 만족했기 때문이다. 고흐의 무덤에 소주 한잔을 따르고 절하면서 ‘내가 드디어 고흐를 만났구나’라고 되뇌는 노화가의 모습에서 긴 울림이 전해진다.

화가로선 치열한 예술혼을 보여준 그이지만 한 인간으로선 그지없이 소박하고 따스하다. 그가 세파에 무너지지 않도록 늘 힘이 되어주었던 가족들, 식구보다 먼저 안부를 챙겨주었던 강아지들, 스케치하느라 다 닳아버린 몽당연필. 화가는 그들 모두에게 속 깊은 애정을 보여준다. 수십 년 동안 서울 구로구 개봉동 산동네에 살면서 자신의 집을 찾지 못해 골목을 헤매거나, 집 나간 개 이름을 부르며 온 동네를 누볐던 일화를 보면 괴짜 같고, 아이 같은 그의 일면에 미소를 배어 물게 된다.
이제 그는, 어느 한 시절 어렵지 않은 세월이 없었지만 큰 희망 작은 희망 가리지 않고, 조금씩 희망 곁으로 다가가니 그 희망이 어느 결에 내 곁에 다가와 있는 것을 알겠더라고 말한다.
예술에 눈 밝지 못한 사람들에게 있어 그의 그림을 평가하기란 힘든 일이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하다. 이 책을 만난 사람들은, 참 아름다운 영혼을 만났다는 생각이 들 것 같다.
고미석기자 mskoh11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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