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50,60代는 위기대처능력 뛰어난 사회자산"

  • 입력 2003년 1월 2일 17시 23분


독일의 심리학자 에릭 에릭슨은 40∼ 65세의 중장년기를 ‘생산성과 침체 사이에서 갈등’을 겪는 시기로 정의했다.

이 시기 초반부는 자녀를 키우는 것을 비롯해 다음 세대를 양성하는 데 관심과 노력을 기울이는 ‘생산’의 시기다. 그러다 점점 나이가 들면서 생산자로서의 역할이 줄어들게 되면 침체감이 형성되기 시작한다.이 시기의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필요로 해야 한다.

어떤 이유에서건 가정과 사회에서 자신의 필요성이 약해질 경우 정체, 지루함, 대인 관계에서의 피폐감 등이 나타나게 된다.

보험회사에 다니던 A씨는 50세가 되던 지난해 명예 퇴직을 ‘당했다’. 회사에 대한 배신감은 둘째치고 ‘퇴물’ 취급을 당해 사회의 뒷전으로 물러난 데 대한 좌절감에 휩싸였다.새 일자리를 찾도록 도와 주겠다는 전문 컨설턴트의 권유가 있었지만 귀담아 듣지 않았다. 그는 퇴직 후 새 일자리를 찾으려 하지 않고 8개월간 과거만 되돌아보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에릭슨의 가설을 따르자면 A씨는 급격히 생산기에서 정체기로 이행하고 있는 사람.

A씨는 재취업 전문 컨설팅 회사인 DBM코리아의 피상담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DBM코리아는 회사와 계약을 맺고 그 회사에서 퇴직했거나 퇴직할 예정인 사람들의 재취업 상담을 해주는 아웃플레이스먼트 업체.

● 조직을 떠난 나를 생각해본 적 없는 세대

DBM코리아의 컨설턴트들이 퇴직을 전후한 50, 60대와 상담을 하면서 느끼는 공통점은 ‘조직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경향이 강하다’는 점이다. ‘평생 직장’ 개념으로 한 회사에 헌신했기 때문에 조직과 분리된 개인의 삶은 대부분 생각조차 해본 적 없다는 것. 유홍열 수석 컨설턴트는 “인생의 목적, 가치 등에 대해서 고민하기 보다는 열심히 일하는 것이 미덕이라고 믿어온 세대”라고 설명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대는 조직에서 밀려나게 되면 ‘왜?’라는 의문을 먼저 갖게 된다. “조직을 위해 아직도 충분히 존재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왜 쫓아내는가” “조직을 이만큼 키워온 공은 왜 조금도 평가해 주지 않는가” “그만큼 비용을 들여 교육 시키고 훈련 시킨 숙련 인력을 왜 내보내려 하는가” 등의 질문을 던진다. 수십 년 몸담았던 조직에 대한 미련이 크다 보니 새롭게 도전하겠다는 의지도 약하다. 이 회사의 김훈태 상무는 “새로운 삶의 방향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거나 그 고민을 토대로 계획을 세우는 사람은 많지 않다”고 지적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오랜 조직 생활에 길들여져 자립심이 아예 사라져버린 경우. 금융업에 종사했던 50대 초반의 퇴직자는 몇 개월 동안 상담을 받으면서도 상담은 뒷전이고 ‘예전 직장에서 다시 나를 불러주지 않을까’하는 기대만을 갖고 지냈다.

같은 50대라도 몇 년의 간격에서 오는 차이는 크다. 임성수 선임 컨설턴트는 “55세에 정년 퇴직한 사람들은 새로운 일을 찾는데 관심을 보이지만 58세 정년 퇴직자들은 아예 재취업에 뜻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말했다.

이런 경향에 비춰볼 때 대기업 L사에서 기술직 임원으로 근무하다 올해 초 조기 퇴직한 K상무(51)의 사례는 매우 예외적이다. 그는 “이전 직장에서의 경험은 새로운 인생을 위한 준비 과정이었다고 생각하자”고 스스로를 독려하며 긍정적인 사고를 하려 애썼다.

그는 몇 군데 회사에서 면접을 봤지만 실패하자 원인을 따졌다. 과거의 경험 이외에 특정 분야에 대한 특기(specialty)가 있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고는 독서실을 다니며 마케팅 관련 서적을 집중적으로 읽었다. 그 뒤 몇 차례의 면접 끝에 그는 기술에 대한 전문성과 마케팅 감각, 조직 생활에 대한 적응력 등을 높이 사 준 한 외국계 기업에 예전보다 높은 연봉으로 재취업했다.

K상무의 재취업 사례에서 볼 수 있듯 이들 세대가 갖고 있는 특징은 받아들이기에 따라 얼마든 긍정적으로 활용될 수 있다고 컨설턴트들은 지적한다.

‘조직 생활에 대한 강한 집착’은 팀워크와 부서간 유기적인 협력을 이끌어내는 능력으로 연결지을 수 있다. 현실 감각이 뛰어나고, 경험을 통해 쌓은 위기 대처 능력도 사회가 그냥 버리기엔 아까운 자산이다.

● 50대, 상실의 시기

‘퇴직’과 맞닥뜨리지 않더라도 한국사회에서 남성 50대는 급격한 심리적 변화를 겪는 시기다.

서울대병원 신경정신과 권준수 교수(44)는 이런 50대를 ‘상실의 시기’라고 설명했다. 가장 큰 상실감은 주변 사람들이 떠나는데서 비롯된다. “부모의 죽음을 맞는 동시에 자식들이 성장해 독립하는 모습을 보게 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지난해 7월 현재 한국인의 평균 수명은 75.6세다. 대부분 기업의 정년 퇴직 나이는 55세∼60세지만 명예퇴직 등 조기퇴직제도의 확산으로 정년마저 채우기 어려운 분위기다. 평균 수명은 늘어난 데 비해 은퇴시기는 앞당겨졌기 때문에 수명이 다할 때까지 주변인으로 지내야 하는 기간은 더 길어졌다. 50대에 일선에서 물러나는 사람의 상실감이 60대에 비해 더 클 수밖에 없는 이유다. 게다가 ‘효(孝)’라는 가치관의 혜택을 조금이나마 더 본 60대에 비해 지금의 50대는 자식 세대에게 큰 기대를 걸기도 힘들다.

권 교수는 “한국의 50대가 살아온 시대적 특징 때문에 상실감으로 인한 피해의식은 더욱 클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젊었을 때는 경제 발전의 주체로서 가족이나 자신을 돌아볼여유도 없이 목표를 향해 달려야했고, 나이가 들어서는 ‘명퇴’니 ‘조퇴’니 하는 제도로 뒷 세대들에 자리를 비워주기 위해 일찍 물러나야 하는 이중의 희생을 겪고 있다는 것.

상실감은 두려움, 분노, 우울, 허탈함 등 다양한 양태로 확산된다. 50대는 또 어느 정도 이룰 것은 이룬 나이여서 새로운 도전에 대한 욕구가 떨어지는 동시에 외부의 새로운 충격을 흡수할 수 있는 탄성도 떨어진다. 권 교수는 “특히 남자가 여자에 비해 수동적으로 변하고 심리적으로 위축되는 경향이 강하다”고 말했다. 이같은 심적 변동을 겪을 때 흔히 나타나게 되는 신체적 증상은 ‘가면성 우울증’. 실제로는 심리적 증상인 우울증을 겪고 있지만 소화불량이나 가슴 통증 같은 신체적 증상으로 외부에 표출되는 것. 정작 본인은 우울증에 대한 자각은 전혀 못하는 경우가 상당수다.

권 교수는 그러나 “외부로부터의 급격한 변화만 가해지지 않는다면 이 나이대의 심리 상태가 긍정적으로 발휘될 여지가 많다”고 지적했다. △신경이 분산되지 않고 한 가지 일에 몰두하는 능력이 뛰어나다 △조금만 힘들면 포기하는 젊은 세대에 비해 인내심과 생명력이 강하다는 점이 50대 이상의 장년층이 갖는 심리적 우월성이라고 권 교수는 설명했다.

금동근기자 gol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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