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속 그사람]"집으면 귀찮아" 무소유 실천한 '해당 할아버지'

  • 입력 2002년 12월 29일 18시 13분


필자가 1970년 갓 결혼해 서울 쌍문동에서 살던 무렵, 아직 수도가 들어오지 않았던 우리 집 사랑방에 노(老)부부가 세를 들어왔다. 이사를 오던 날 팔순의 할아버지는 대문의 내 문패 바로 밑에다 손수 먹으로 써서 만든 초라한 나무 문패를 매달아 놓았다.

한자로 ‘해당우거(海堂寓居)’-해당이 임시로 얹혀 사는 누추한 곳이라는 뜻이었다. 문패의 글씨가 심상치 않아 아내에게 물었더니 해당 할아버지가 ‘서예가’라고 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특히 게를 잘 그리는 동양화가였고, 그래서 할머니가 장에 갔다가 사온 게를 방바닥에 들여놓고는 늘 그림을 그렸다.

할아버지는 남의 집에서 세를 살 어른이 아니었다. 아들이 당시 강릉 MBC 국장이었고, 맡아서 가르치는 서예 제자도 많았으며, 그림 값도 많이 받았다. 언젠가는 묘비에 들어갈 글을 써주고 수표 한 장을 받아왔는데, 그날 밤 헐레벌떡 찾아온 어떤 사람이 100만원이 아니라 1000만원짜리를 잘못 주었노라고 했다.

쌍문동 우리 집을 99만원에 샀으니, 할아버지는 한국일보사에서 1만2000원의 월급을 받던 나보다 분명 훨씬 부자였다. 그리고 보지도 않고 받아서 호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수표를 꺼내보더니 해당 할아버지가 껄껄 웃으며 말했다.

“이거 동그라미가 하나 더 있구먼.”

그런데도 사랑방을 얻어서 살았던 까닭은 “집을 따로 가지면 귀찮기 때문”이라고 했다. “다리 뻗을 만한 자리만 있으면 거기가 내 집이니까.”

해당 할아버지는 삶을 살아가는 방법에 있어서 내가 진심으로 존경했던 첫번째 사람이었다.

안정효/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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