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김순덕]상처는 치유된다

  • 동아일보
  • 입력 2002년 12월 27일 18시 05분


사람들은 요즘 “너도 찍었지?” 하거나 “원하시는 후보가 당선돼서 기쁘시지요” 하고 인사한다. 조금 더 친하면 “큰일날 뻔했지 뭐야” 하며 축제 분위기를 만끽하거나 “등에서 식은땀이 난다는데…” 하면서 말이 길어지지만 대체로 계속하려 들지 않는다. 나이와 성향이 비슷하든지 본적을 아는 사이가 아니라면 더 이상 드러내지 않는 게 속 편하다.
누가 뭐래도 민심이 원하는 것은 변화와 개혁이었다고 전문가들은 해석한다. 그러나 국민이 더 열광한 것은 개인 노무현이었다. 정당정치의 기본엔 눈감은 채 사람들은 집권 민주당보다 노무현이라는 ‘바보’(노사모의 표현)에 매료됐다.
불우한 젊은 날을 딛고 사법고시에 합격하고, 사울에서 바울로 개과천선하듯 돈만 알던 변호사에서 인권 운동가로 변신하고, 고비에 이를 때마다 원칙을 강조하며 진검승부를 마다하지 않은 노무현 대통령당선자의 ‘내러티브’는 한국판 영웅신화나 다름없다. 특히 한쪽에 인터넷을, 또 한 손엔 휴대전화를 잡고 신나게 월드컵 축제를 치러낸 젊은 세대들에게 노 당선자는 어려운 과제를 하나하나 해결해가며 한 단계씩 올라가 드디어 공주를 구해내는 컴퓨터 게임의 주인공처럼 통쾌한 대리만족을 안겨주었다.
컴퓨터 게임에선 주인공이 공주와 포옹하면 팡파르와 함께 해피 엔딩으로 끝나게 돼 있다. 그러나 노 당선자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끊임없이 분출될 각계각층의 기대와 요구는 물론 자기 자신과도 맹렬한 전투를 계속해야 한다.
새로운 정보 기술의 번창 뒤에는 민중의 폭발이 이어졌다고 역사는 말해주고 있다. 모르고 지내왔던 것을 갑자기 너무 많이 알게 되어서다. 15세기 구텐베르크의 활자 발명 이후엔 종교개혁뿐 아니라 종교전쟁도 벌어졌다. 1990년대 인도의 힌두교 극단주의 노동자들의 폭동도 민주화와 더불어 비디오테이프 인터넷 같은 새 테크놀로지에 힘입었다는 분석이 있다. 권력이란 결코 한계를 모르는 것처럼 군중 역시 포만감을 느끼지 못한다고 20세기 지성으로 꼽히는 엘리아스 카네티도 말한 바 있다.
아래에서의 갈등만 터져 나오는 게 아니다. 노 당선자는 자기 자신과도 맞서야 한다. 오만한 영웅 오이디푸스는 패가망신할 때까지 비판을 용납하지 않아 비극을 자초했다. 민중의 지지를 바탕으로 출발했던 나치와 구소련이 무자비한 권력을 휘두른 것도 다름 아닌 “지구상에 평화를” 외치면서였다.
대선이 끝나자마자 화합과 대통합을 강조하는 말들이 나오는 것도 이런 상황 때문이다. 특히 이번처럼 극명하게 세대간, 지역간, 이념간의 차이가 드러났던 선거 뒤엔 모두를 아우르는 정치가 필요한 것도 당연하다.
그러나 화합과 대통합은 최고통치자가 정책으로 펼 일이지, 국민에게 요구할 일은 아니다. 군사정권시절 익히 들어왔던 ‘국론통일’ ‘총화단결’ 구호처럼, 위에서 주창하는 화합과 대통합은 “이견을 내지 말고 조용히 따르라”는 말과 다르지 않다.
상처의 미학은 그래서 의미가 있다. 찔러도 피 한 방울 안나올 것 같은 사람이라는 말이 욕설로 쓰이듯, 찔리면 피를 흘려야만 사람이다. 서로 다른 이들이 사는 세상엔 이견과 갈등과 상처가 있는 게 자연스럽지, 모두 위만 바라보며 하하 호호 웃으면 그게 되레 비정상이다.
상처는 상처로 드러내야 치유가 된다. 우리 몸엔 원래 상태로 돌아가 스스로 건강을 유지하려는 항상성이 있어 시간이 가면 낫는다. 제때 적절한 처치를 거쳐 아문 흉터는 단순한 고통이 아니다. 우리가 살아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하지만 서둘러 봉합하거나 억지로 싸매거나 항생제로 내성을 키우면 상처는 되레 덧나고 오래간다. 정치에 비유하면 자기 의도대로만 통치하는 인위(人爲)인 셈이다. 장자는 이것이 온갖 싸움과 갈등의 원인이 되는 가장 나쁜 행위라고 했다.
다행히 노 당선자도 물 흐르는 듯한 개혁을 강조하고 있다. 우리가 모처럼 갖게 된 ‘스타 대통령’은 정치 잘한다는 칭송을 듣고 싶어할지도 모른다. 그보다는 대통령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만큼의 무위지치(無爲之治)를 해주면 좋겠다. 그래야 상처도 곱게 아문다.
김순덕 논설위원yu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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