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형 열린마음 열린세상]"요즘 응석이 아무데나…"

  • 입력 2002년 11월 27일 18시 25분


서구, 특히 미국 남자들이 더 피곤한 건 응석을 부릴 데가 없기 때문이다. 언제나 강하고 독립적이어야 하는, 이른바 ‘존 웨인 콤플렉스’ 때문이다. 사회도 그렇게 기대하고 또 자신들도 그렇게 행세해야 한다.

거기에 비하면 우리는 참 행운아다. 평생을 응석받이로 지낼 수도 있으니 말이다. 골프장에서 백발의 형제가 다투고 있다. “형, 한 점만 더 줘!” 동생이 응석을 부린다. “안 돼, 녀석아. 엄살 떨지 마.” 형이 그런다고 물러설 동생이 아니다. 죽는시늉을 하면서 “한 점만” 하고 떼를 쓴다. 참으로 아름다운 장면이다. 70대는 되어 보이는 나이에도 저럴 수 있는 형제가 부럽다.

▼사람과 사람사이 윤활유 역할▼

응석이라면 ‘전국 노래자랑’의 송해씨를 빼놓을 수 없다. 무대에 올라온 여성 출연자에게 어깨를 흔들며 응석을 떠는 모습이라니, 폭소를 자아낸다. 참 귀엽다.(실례!) 온통 무대가 정이 넘쳐흘러 훈훈하고 따뜻하다. 노래가 절로 나온다.

이처럼 응석은 대인관계를 한결 부드럽게 해 주는 윤활유다. 이게 없으면 사무적이 되어 관계가 아주 딱딱해진다. 긴장과 불안으로 가득 찬 현실에서 응석만큼 좋은 정신치료제도 달리 없다. 따라서 응석을 받아줄 사람이 없다는 건 참으로 불행이다. 마찬가지로 자신에게 응석을 부리는 사람이 없다는 것 역시 불행이다. 갱년기가 되면 아이들은 모두 밖으로 싸다닌다. 빈 둥지의 어미새가 우울증에 빠지는 것도 그래서다.

유학 다녀온 아들이 용돈을 받아들고 “고맙습니다”라고 인사하는 통에 아버지가 그렇게 서운했다는 이야기도 참으로 한국적이다. 차라리 “만원만 더!” 하고 떼를 썼더라면.

이처럼 응석의 세계는 정(情)의 세계다. 네 것 내 것이 따로 없다. 미운 짓을 해도 모두가 용서되는 용광로다. 물론 거기엔 합리성이나 논리성이 있을 수 없다. 그저 어거지다. 응석이 안 통하면 떼를 쓴다.

응석의 원형은 아이와 엄마 사이다. 아버지의 엄한 권위주의에 주눅이 든 아이가 엄마 앞에 응석을 부림으로써 긴장이 풀리고 정서적으로 안정된다. 자라면 선생과 학생, 직장 상사, 심지어 길가는 사람에게까지 아저씨, 할아버지라 부르며 응석을 떤다.

사회적 약자가 때론 무리한 요구를 하고, 말도 안 되는 어거지를 써도 우린 이를 귀엽게 애교로 봐 준다. 그리고 웬만하면 청을 들어준다. 이렇듯 우리에겐 참으로 아름답고 인간적인 전통이 이어져 온 것이다.

학생들의 총장실 점거, 심지어 술꾼의 주정까지 한국 사회는 응석 일색이다. 한데 우리 사회가 세계화되면서 여기에 부작용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미국 본사에서 한국지사장으로 부임한 존슨씨. 식식거리며 내 진료실을 찾아왔다. 회사의 한국 직원이 불법 파업에 들어갔다는 것이다. 가당찮은 요구를 하면서 과격한 구호, 데모, 드디어 사무실 기물까지 파손하고 있으니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나는 일단 그의 흥분을 진정시키고 한국인의 무의식적 심성을 이야기하면서 그를 이해시키려 했다.

“그게 한국인의 심성 깊숙이 젖어 있는 응석일지 모릅니다.” 아이가 엄마한테 무리한 요구를 한다. 응석을 부려도 안 들어주면 떼를 쓴다. 물론 엄마로서는 쉽게 들어줄 리가 없다. 아이는 방바닥에 뒹굴기도 하고 자기 인형을 집어던지고 부수기도 한다. 그리곤 엄마 가슴을 치면서 칭얼댄다. 물론 이건 응석이요 생떼다. 하지만 합리적인 서구인의 눈에는 분명 폭력이요 폭행이다.

▼합리적 요구와 조화가 과제▼

여기까지 설명이 진행되었지만 벽안의 신사에겐 설득력이 없었다. 시골 부부 싸움하는 이야기까지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겨우 남편이 마루 끝에 앉아 담배를 피우는데 아내가 때리라고 머리를 들이민다. 남편이 비켜앉아도 계속 따라간다. 드디어 남편이 확 밀어제친다. 그러자 아내는 기다렸다는 듯 “동네 사람들아, 사람 잡는다” 하고 고함을 친다.

그래도 이해가 안 되는지 “무슨 싸움을 그렇게 해?” 그의 눈이 점점 더 커진다. 그게 한국인의 응석싸움인데, 서구인의 생각에 납득이 갈 리가 없는 것이다.

일상생활 중에 미처 의식하진 못하지만 우리의 무의식 속에는 응석과 떼거지가 뿌리깊이 박혀 있다. 불행히도 우리의 넓은 포용성, 깊은 인간애가 담긴 이 아름다운 전통이 ‘합리성’이라는 글로벌 스탠더드와 마찰을 빚고 있는 것이다. 이제 이는 우리 사회가 풀어야 할 과제가 됐다.

그렇다고 약자의 합리적 요구마저 응석이라는 이름으로 몰아붙일까 두렵기도 하다.

이시형 사회정신건강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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