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된장내’ 옛 기억을 쿡쿡 건드리다 ´된장´

  • 입력 2002년 10월 18일 18시 30분


작가 문순태씨는 “된장맛은 신념이나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관용과 포용의 미학”이라고 말한다. 사진은 시골의 장독대. 동아일보 자료사진
작가 문순태씨는 “된장맛은 신념이나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관용과 포용의 미학”이라고 말한다. 사진은 시골의 장독대. 동아일보 자료사진
◇된장/문순태 지음/320쪽 8500원 이룸

“이번 창작집은 내 소설 세계에 대한 변화의 시도이자 조짐입니다. 오랫동안 묶여있던 분단과 5·18이라는 거대담론에서 조금은 자유로와졌다고 할까요.”

‘시간의 샘물’ 이후 5년 만에 소설집 ‘된장’을 들고 온 작가 문순태씨(61)는 자신을 휘감고 있던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비켜나 이제 새로운 눈을 뜨게 됐다고 했다. 작가 특유의 토속성이 더욱 짙은 빛을 발하는 ‘된장’은 ‘슬픈 아름다움’이라 표현할 수 있는 고향의 정서를 복원하고 싶은 그의 바람이 담긴 책. 문씨는 지금 시골집 뒤란에 서있다.

“나는 1980년 5월의 광주를 겪은 사람입니다. 사실 광주사람들은 거대담론에 묶일 수 밖에 없었지요. 고향사람들의 정서에는 역사를 첨예하게 보는 눈과 한을 품은 마음이 공존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나는 이들에게서 원한(怨恨)과 회한(悔恨)을 봅니다.”

전작들의 메시지가 ‘원한’을 에너지 삼아 복수의 의지로 발전, 생명력으로 승화됐다면 1990년대말부터 발표한 작품들에는 ‘정한(情恨)’ 즉 고향사람들의 기다림 그리움 애틋함을 담아 어머니 아버지의 마음에 있는 정서를 다시 확인하고 싶었다는 설명이다.

이번 소설집에서 거대담론은 ‘느티나무 아래서’ ‘그리운 조팝꽃’에 스쳐가듯 다뤄질 뿐이다. ‘문고리’ ‘된장’ 등 대부분의 작품은 전통적 정서와 구수한 고향 냄새를 풍긴다.

“된장은 곧 고향 사람의 정신입니다. 된장맛은 참 묘하지요. 맵고 짜고 시고 단, 갖가지 뾰족한 맛들을 조화롭게 통합합니다. 우리 민족의 정신과 일맥상통한 것이지요.”

그는 ‘집안이 흥하려면 된장 간장 맛부터 살려야 한다’는 옛말을 믿는다. 표제작 ‘된장’에서도 도망치듯 떠난 미국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돌아 온 모녀가, 쇠락한 집안을 일으키기 위해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된장을 만드는 것. 어머니에게는 된장맛을 되살리는 것이 곧 정신을, 쓰러진 집안을 찾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미혼의 딸은 인공수정으로 아이를 가지려 한다. 여성의 핏줄을 통해 대를 잇는다는 점에 주목해달라는 작가는 “내가 보수적이면서도 일면 진보적”이라며 껄껄 웃었다. 그는 “11대 종손인 아들이 딸아이 하나만 두겠다는 것에 역정이 나기도 했지만 이제는 여성을 통해서도 집안을 이어 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삶의 뿌리를 깊게 응시하는 작가의 시선은, ‘끝을 향하여’ ‘혜자의 반란’ ‘자전거타기’ ‘운주사 가는 길’ 등에서도 일관되게 드러난다. 휘청거리며 앞으로만 나아갔던 주인공들은 무능한 남편과 임신한 동거녀에게 다시 돌아가고, 지체장애인들에게서 진정한 부처의 모습을 발견하기도 한다. 삶의 근원을 찾아가는 셈이다.

“도시의 삶에서 생기는 병든 찌꺼기보다는 물레방아 돌아가는 소리, 풀, 꽃, 나무의 향기가 소중하고 중요하다는 사실을 요즘 젊은 사람들이 잘 모르는 것 같다.” 안타까움을 토로하는 작가의 ‘된장내’가 침잠해 있던 옛 기억을 쿡쿡 건드린다.

조이영기자 lyc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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