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가짜서류'로 4000억원 대출이라니

  • 입력 2002년 10월 4일 18시 33분


남북정상회담의 뒷거래 의혹이 갈수록 태산이다. 재작년 정상회담이 있기 직전에 산업은행이 현대상선에 대출하면서 받은 약정서에 채무자인 대표이사 서명이 빠져 있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대출절차가 까다롭기로 이름난 국책은행에서 일어난 일이라 의혹은 더 커질 수밖에 없다.

한나라당의 엄호성(嚴虎聲) 의원이 공개한 대출약정서 사본에는 당시 현대상선 대표이사인 김충식(金忠植) 전 사장의 서명이 없다. 약정서 제목에는 당좌대월 한도가 4000억원으로 되어 있으나 본문에는 40억원으로 적혀 있고 차입신청서 융자금영수증 등의 서류도 제대로 기재되어 있지 않는 등 허술하기 짝이 없다.

은행에서 돈을 빌릴 때는 아무리 작은 돈이라도 자필로 서명하는 게 금융계의 관행이다. 은행들은 대출서류에 법인 인감과 자필 서명이 없으면 이를 무효로 간주한다. 산은은 대출서류에 문제가 없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자필 서명이 없이 대출한 것은 여신규정을 위반한 셈이다. 이 경우 다툼이 생겼을 때 빌린 사람을 확인하지 못해 대출해준 은행이 거의 예외 없이 패소한다고 한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엄 의원이 “산은과 현대상선이 김 전 사장 몰래 조작한 가짜 서류”라고 주장하는 것도 설득력 있게 들린다. 산은과 현대상선이 “서류상의 하자가 있었다 해도 착오였을 것”이라고 해명하고 있으나 유독 6월에 대출했을 때만 김 전 사장의 서명이 없다는 것은 납득이 되지 않는다.

엄낙용(嚴洛鎔) 전 산은총재는 지난달 국감 증언에서 “김 전 사장이 6월에 대출받은 4900억원은 손도 못 댔으니 정부가 갚아야 한다고 말했다”고 증언했다. 대출서류가 김 전 사장 몰래 만들어진 가짜라면 이는 엄 총재의 증언을 뒷받침하는 증거가 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누군가가 가짜서류를 만들고 4000억원을 대출받도록 지시했을 가능성이 크다. 산업은행 내부의 지시인지, 아니면 은행 외부인물이 압력을 넣은 것인지 낱낱이 조사해야 한다. 이젠 그 배후가 누구인지를 추적해서 밝혀내야 할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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