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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2년 8월 26일 17시 4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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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공 타고 온 鄭風▼
이탈리아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총리는 축구 열기를 이용해 최고 권좌에 오르는 길을 닦은 정치인이다. 그는 80년대와 90년대 초 유럽에서 가장 성공적이었던 AC 밀란 구단을 경영했다. 페르난도 콜로르 데멜로 전 브라질 대통령은 축구단을 운영하며 대중의 관심을 끌기 시작해 1989년 40세로 최초의 민선 대통령이자 최연소 대통령의 기록을 세웠다. 베를루스코니 총리는 세계 부호 순위 10위권을 맴도는 언론재벌이고 콜로르 데멜로 전 대통령은 아버지가 상원의원을 지낸 대지주 집안 출신이지만 이들이 최고의 권좌에 오르기까지에는 축구를 빼놓고서 이야기할 수 없다.
한국에서는 월드컵 이전만 하더라도 K리그가 열리는 경기장 스탠드가 텅텅 비었으나 월드컵 4강 신화를 이루고 나서 축구를 둘러싼 환경이 일거에 바뀌었다. 축구 열기를 타고 축구협회장 정몽준 의원은 모든 여론조사에서 한나라당 이회창 대통령후보와 함께 수위를 다투고 있다. 한나라당이 최근 민주당 노무현 대통령후보 대신에 정 의원 공격에 나서는 것을 보면 여론조사 결과가 허수만은 아닌 것 같다.
정 의원이 명시적으로 대선 출마를 선언한 적은 없지만 일련의 발언에서 출마 결심이 굳어 있음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신당 창당 등 구체적인 거취에 관한 질문을 받으면 답답함이 느껴질 정도로 핵심을 피해 가는 답변을 하면서 월드컵 기념 행사에는 빠지지 않고 참석한다.
18일 열린 월드컵 스타 송종국 선수의 고별전에는 3만5000명의 관중이 부산 구덕운동장을 가득 메웠다. 이날 텔레비전으로 경기를 시청한 인구가 수백만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정 의원은 하프타임에 송 선수와 나란히 운동장 한가운데 서서 텔레비전 시청자와 관중의 시선을 끌었다.
언론기관 사회단체들은 월드컵을 기념하는 행사를 경쟁적으로 개최하고 있다. 텔레비전 공익광고에서도 감격스러운 장면을 담은 화면과 함께 월드컵의 정신을 이어가자는 구호를 반복한다. 월드컵 기념 행사와 공익광고의 기획 의도가 대선에서 딱 누구를 도와주자는 뜻은 아니겠지만 음으로 양으로 정 의원에게 플러스가 되는 것도 사실이다.
지난주 정 의원은 현 정부에서 대통령자문정책기획위원장을 맡았다가 6·25 관련 논문을 둘러싸고 모 신문과 사상논쟁을 벌였던 고려대 최장집 교수의 강의 시간에 들러 학생들에게 인사말을 했다. 사회자가 내일 모 신문에 ‘정 의원 빨갱이 교수와 만나다’라는 기사가 실리지 않겠느냐고 조크성 질문을 던지자 그는 “붉은 악마도 모릅니까”라고 받아넘겼다. 그러나 정치적 발언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정치판에서는 병역 의혹으로 사생결단의 싸움이 벌어지고 다른 한쪽에서는 신당을 둘러싼 혼돈이 지속되고 있다. 이전투구의 싸움판에서 모두 흙탕물을 뒤집어쓰는 판에 정 의원은 한발 비켜서서 월드컵 뒤풀이 성격의 ‘오 필승 코리아’나 ‘붉은 악마’ 행사를 독점하고 있으니 인기 유지에는 도움이 될 것 같다.
그가 스포츠 외교를 통해 월드컵을 유치하고 한국 축구를 세계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려 놓는데 기여한 공로는 결코 작다고 할 수 없다. 경제계에서는 현대중공업의 최대 주주로 전문 경영인 체제를 유지하며 특별히 흠이 잡힐 일을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대통령 후보로 나서 텔레비전 토론과 현미경을 들이댄 검증이 시작됐을 때 지금과 같은 인기도를 유지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정치도 축구처럼 될까▼
유럽이나 남미에서 ‘축구 정치’에 성공한 사람들은 모두 개인 구단을 경영한 기업인들이다. 축구협회는 대한체육회 산하 경기단체로 정 의원 개인 소유의 구단은 아니다. 대권을 꿈꾸는 인물에게 소소한 주문이 될지는 모르겠으나 10년 동안 이끈 축구협회를 이쯤에서 다른 이에게 넘겨주는 모습이 보기에 좋을 것 같다. 정 의원이 히딩크 감독과 태극전사들에게 지나치게 의존하다 보면 자칫 축구 하나로 버티는 인상을 주기 쉽다.
스포츠는 현란한 구경거리이지만 얽히고설킨 국정 과제를 해결하는 도구가 되지는 못한다. 월드컵 축구에서 성공을 거둔 자질이 정치와 국가경영에서도 통하는지를 보여줄 수 있느냐에 따라 정 의원이 10년 공들인 ‘축구 정치’의 성패가 달려 있다고 하겠다.
황호택 논설위원 hthw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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