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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2년 8월 9일 18시 4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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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여개 시민사회단체들로 이뤄진 ‘덕수궁터 미 대사관·아파트 신축을 반대하는 시민모임’(이하 시민모임)은 9일 오전 서울 종로구 세종로 정부종합청사 후문에서 ‘정부의 문화주권을 파는 매국행위를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갖고 “우리 문화재를 보호해야 할 정부가 오히려 미국측의 문화재 파괴에 협조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경과〓덕수궁터 미 대사관 신축 논란은 5월 미 대사관측이 2004년까지 서울 중구 정동 현 미 부대사관저 자리에 8층짜리 직원용 아파트(54가구)와 4층 규모의 경비 숙소를, 2008년까지 옛 경기여고 자리에 지하 2층, 지상 15층의 대사관 신청사를 짓겠다며 건설교통부에 협조를 요청하면서 불거졌다.
건교부는 당시 미 대사관 신축을 허용하고 직원용 아파트 역시 외교관 시설인 만큼 주택건설촉진법 시행령에 예외조항을 신설해 허용한다는 방침을 밝혔다가 반대 여론이 커지자 철회했다.
이후 건교부와 문화관광부, 서울시 등은 미 대사관·아파트 건축계획이 △20가구 이상 공동주택 신축시 어린이 놀이터와 상가, 노인정 등 부대시설을 갖추도록 한 주택건설촉진법 △최소 주차시설을 갖추도록 한 주차장법 △매장문화재가 있는 지역에 대한 개발을 제한한 문화재법 등에 저촉된다며 반대입장을 밝혀왔다.
▽최근 정부 움직임〓대사관 신축에 걸림돌이 되는 국내법 중 미국이 가장 조심스러워하는 것은 문화재법이다. 미 대사관이 들어설 터가 조선시대 역대 왕들의 영정을 모셔둔 선원전(璿源殿)이 있던 곳이기 때문이다.
문화재법에 따르면 이런 곳에 새로운 건물을 짓기 위해서는 먼저 문화재발굴 전문기관의 지표조사가 있어야 한다. 그간 미 대사관측은 지표조사를 맡길 기관을 찾아왔으나 국내 문화재 연구기관들이 일절 응하지 않자 최근 문화부가 적극 나서 조사기관 선정 등에 협조키로 한 것이다.
이와 관련, 정부 관계자는 9일 “덕수궁터 미 대사관 신축 문제는 정부가 문화재 보호와 외국과의 약속이행 중 어느 쪽이 장기적으로 더 중요한지를 선택해야 하는 문제”라면서 “옛 경기여고 부지 등 상당지역은 이미 개발이 됐던 곳이라 지표조사결과가 미 대사관 시설 건축에 지장을 줄 가능성은 많지 않아 보인다”고 말했다.
▽미 대사관 입장〓미 대사관측은 “대사관 예정부지는 미국땅으로 치외법권 지역이며 현실적으로 대체부지 마련이 어려운 만큼 다른 곳으로 이전할 계획은 없다”는 원칙만을 되풀이해서 밝히고 있다.
미 대사관측은 또 “덕수궁터의 대사관 신축 계획은 오래 전부터 추진된 일이고, 부지 매입 때까지 아무런 문제가 없었는데 이제 와서 한국측이 반대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미 대사관과 서울시는 86년 경기여고터와 미 문화원 등을 맞교환하기로 하고 ‘재산교환 양해각서’를 체결한 바 있다. 당시 교환내용은 미 문화원 점거농성사건 등으로 유명했던 을지로1가 소재 미 문화원 부지(현재 서울시민대학으로 사용 중)과 종로구 송현동 미 대사관 숙소에서 길가로 돌출돼 교통체증을 일으키던 부분을 서울시가 양도받고 여기에 현금 39억원을 추가로 지급받는 조건으로 경기여고터를 내준다는 것이었다.
한편 미국측은 대사관 신축이 현행법에 저촉되는 부분에 대한 관련법 개정이 여의치 않게 되자 현재는 외교통상부에 외교적 협조를 구하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한 상태다.
▽시민단체와 학계의 주장〓현재 시민단체와 학계 등은 “덕수궁터에 문화재가 있건 없건 그곳이 문화유적지이니 만큼 외국대사관 건립은 안 된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이들은 또 서울시와 정부가 옛 덕수궁터를 재매입해 덕수궁을 비롯한 정동 일대를 ‘문화지구’로 지정하고 미 대사관과 아파트의 대체부지를 마련할 것을 요구 중이다.
시민단체들은 관련부처 중에서도 서울시의 태도가 중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천준호(千俊鎬) ‘시민모임’ 집행위원장은 “관련부처들이 많지만 그 중에서도 86년 문제의 터를 대사관에 제공했고 현재도 대체부지를 마련할 권한을 가진 서울시가 입장을 명확하게 해야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명박(李明博) 시장은 최근 기자들에게 “미국측이 대체부지를 먼저 원한다고 하지도 않는 데 서울시가 먼저 나설 수 없는 일”이라며 “이 문제는 서울시보다는 외교부가 대화상대로 나서서 해결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서영아기자 sy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