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주기자의 건강세상]에이즈 키우는 나라

  • 입력 2002년 6월 9일 22시 07분


월드컵 조별리그에서 미국이 포르투갈을 격파한 ‘쇼킹 데이’ 5일, 또다른 쇼킹한 일이 신문에 소개됐다. 에이즈에 감염된 20대 여성이 전국을 돌아다니며 수천명의 남성을 상대로 윤락행위를 벌이다가 구속된 사건이다. 곧바로 월드컵 열기 속에 묻혀버렸지만 평소였다면 며칠 동안 신문을 도배했을 충격적 일이었다.

일부 시민은 월드컵 기간에 입국하는 외국인들이 에이즈를 퍼뜨릴 것으로 우려했지만 정작 우리 속에서 에이즈가 곪고, 터지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대다수 전문가들은 월드컵이 에이즈를 확산시킬 것이라는 시각에 동의하지 않는다.국내에서 에이즈는 더 이상 외국인이 퍼뜨리는 병이 아니며 또 오로지 축구 만을 위해 내한한 ‘사커 마니아들’이 에이즈를 퍼뜨리는 주범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정부에 따르면 올 3월 현재 국내 에이즈 바이러스 감염자 수는 1686명. 이들의 치료를 돕는 것은 곤경에 빠진 이웃을 사랑하는 당연한 일이기도 하지만 비감염인들을 에이즈로부터 보호하는 길이기도 하다.

환자들이 제대로 치료받으면 혈액 속 바이러스 수가 격감하고 이 경우 전염력이 뚝 떨어진다. 반면 환자들이 제대로 치료받지 않고 숨어버리면 에이즈 확산은 불을 보듯 뻔하다. 그러나 환자들은 몇 겹의 고통을 이겨내지 못하고 음지로 향하고 있다.

환자들은 발이나 손이 잘려도 병원에서 치료를 거부당하기 일쑤다. 친척이나 친지로부터 당하는 따돌림은 상상조차 하기 힘들다.

병원에서 에이즈와 관련한 치료를 받고 진료비를 내면 정부와 지자체로부터 이 진료비를 환급받을 수 있는데 정부와 지자체가 예산 난을 이유로 몇달씩 늦추기 일쑤다. 그동안 환자의 카드에는 연체료가 늘어만가고 결국 치료를 포기하기도 한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는 올 4월 환자들을 더욱 낙담토록 하는 정책을 발표했다.

보험 재정 때문에 환자의 혈액에서 바이러스가 얼마나 있는지 검사하는 비용을 환자에게 환급해 주지 않는다고 밝힌 것이다. 이 검사는 환자의 치료 상태를 확인하는 데 필수적이다.

환자는 전체 진료비에서 검사비를 빼고 환급받기 때문에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고 일부는 치료를 중단하게 마련이다. 이 결과로 병이 도져 응급실에 실려오면 500만∼600만원이 드는데 이는 원래 외래진료비가 엇비슷하다. 정부로서는 똑같은 돈을 쓰면서 환자를 골병들게 하고 에이즈를 퍼뜨리는 것이다.

또 환자가 진료비 부족으로 약을 제대로 먹지 않으면 몸속 에이즈 바이러스가 내성을 가질 확률도 높아진다. 이때에는 바이러스 제압이 더욱 힘들어진다. 결국 정부의 에이즈 대책은 책상머리 정책, 미봉책의 전형적 사례다. 눈앞의 돈을 아끼려다가 너무나 많은 것을 놓치게 되는 것이다. 정부는 국민의 건강을 위해 미래를 내다보는 ‘히딩크의 지혜’를 하루빨리 배워야 한다. stein33@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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