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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2년 6월 5일 23시 2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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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술사가 힘을 잃자 나머지 ‘10명의 전사’는 ‘10명의 난쟁이’로 변해버렸고 이들이 탑승한 ‘포르투갈 호’는 서서히 침몰해버렸다.
네덜란드의 ‘축구 전설’ 요한 크루이프가 “세계에서 가장 재능있는 선수”라고 평했고 프랑스의 ‘축구 영웅’ 미셸 플라티니가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선수”라고 극찬했던 포르투갈의 루이스 피구(30).
처음이자 마지막 월드컵이 될지도 모를 이번 대회에 “모든 것을 쏟아붓겠다”며 전의를 불태웠지만 그의 화려한 명성을 감안하면 5일 미국전에서 보여준 모습은 실망 그 자체였다.
간혹 현란한 개인기로 관중들의 탄성을 자아내긴 했어도 오랫동안 그를 괴롭혔던 발목부상이 완치되지 않은 탓인지 발걸음은 가볍지 못했고 패스워크도 무뎠다. 공간을 정확하게 침투해 ‘아군’ 공격수의 머리와 발에 정확히 갖다주는 송곳패스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공격형 미드필더로 나선 피구는 전반전 초반엔 오른쪽에 포진했으나 중반 이후부턴 중앙과 왼쪽을 동시에 오가며 활동영역을 넓혀갔다. 코너킥과 프리킥은 그의 전담. 전반 7분경 골에어리어 중앙에서 그가 프리킥 키커로 나서자 관중석에선 “피구! 피구!”를 연호하며 환호성을 보내 인기를 실감케 했다. 0-3으로 뒤진 전반 38분에는 오른쪽 코너킥으로 동료인 베토의 머리에 정확히 연결해 만회골에 도움을 주기도 했다.
하지만 중원을 지휘하는 공수연결자로서 그의 활약은 기대에 못 미쳤다. 동료들과의 원활한 패스가 이뤄지지 않아 공격을 풀어나가는 데 애를 먹었고 미국 수비진의 적극적인 마크에도 힘에 부쳐 하는 모습.
피구는 경기가 제대로 안 풀리자 소리를 지르며 짜증스러워했고 동료들이 패스미스를 할 때마다 두 손을 양쪽으로 치켜들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뛰는 시간보다 걷는 시간이 더 많았을 정도로 체력적으로도 불완전했다. 지난해 국제축구연맹(FIFA) 선정 ‘올해의 선수’가 맞나 하는 의문이 들 정도였다.
경기 종료를 알리는 휘슬이 울리자 고개를 푹 숙이며 침통한 표정으로 가장 먼저 그라운드를 벗어난 피구. 이번 대회에 앞서 “지쳤다. 이젠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낼 준비가 돼 있다”며 은퇴의사를 내비쳤던 피구는 정말 지친 모습이었다.
피구는 경기가 끝난 뒤 “아주 나쁜 출발이다. 이상한 상황에서 3골을 내줬다. 준비한 전술들이 잘 안 먹혔으며 실수가 너무 많았다”고 말했다.
수원〓김상수기자 sso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