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의 자아경영]임부가 생명을 품듯 병생의 진리 배우자

  • 입력 2002년 5월 31일 17시 59분


생명에 관한 아홉 가지 에세이/ 박재현/이도흠 외 /교수신문 엮음, 민음사, 2002

나는 논문을 싫어한다. 논문처럼 멋없는 전달형태는 없다. ‘남의 언어를 빌어 쓴 무수한 각주 뒤에 몸을 순긴’ 지식인들의 배타적 자기 표현법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학계에서 시도된, 논문 형태의 글쓰기와는 다른 표현 방법의 모색이며, 기존의 형태에 갇히지 않는 ‘패기있고 신선하고 자유로운’ 사유에 대한 실험이다. 우리는 ‘신적 질서에 대한 인간의 도전’에 두려움이 증가되는 이때, 이 책에서 인류 공통의 핵심 화두 중의 하나인 생명에 대한 학술 에세이 당선 작품 아홉 개를 만나 볼 수 있다.

다 소개 할 수 없으니, 최우수작 2개를 중심으로 나대로 섞어서 소개해 보자.

나의 존재만큼 사무치는 것은 없다. 남의 아픔에 공감한다한들 내 아픔에 비교할 수 없다. 나의 삶은 다른 사람들의 삶보다 더 절실하다. 그런데 임산부는 자기 속에 남을 품는다. 타인을 품고도 불편과 고통을 감내하고 오히려 감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본능일까? 아니면 아이를 타인으로 인식하지 않기 때문일까? 만일 이 인식의 지평을 조금만 넓혀보면 장자의 말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천지는 나와 더불어 함께 생겨나니 만물이 나와 함께 하나가 된다.’

병생(竝生), 즉 함께 산다는 것은 우리의 존재가 홀로 살 수 없는 것임을 의미한다. 타자와 합해져 더 큰 내가 된다. 임산부의 배처럼.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비로소 나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생겨난다. 아이가 있어야 어머니가 있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병생은 공존이다. 나와 타인의 공존이고, 인간과 자연의 공존이다. 내가 아닌 다른 것 속에서 나를 발견하고, 내 속에서 타자와의 연결을 찾아 내지 못하면 공존은 불가능하다.

원효의 ‘금강삼매경론’에 열매와 씨에 대한 비유가 있다. “열매와 씨는 하나가 아니다. 그 모양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것도 아니다. 씨를 떠나서는 열매도 없기 때문이며…열매가 이어져서 씨가 생기기 때문이다.”

이것이 화쟁의 ‘불일불이’(不一不二) 원리다. 우열이 아니라 차이를 통해 자신을 드러내고, 투쟁이 아니라 자신을 소멸시켜 타자를 이루게 하는 것이 화쟁이다.

달리 표현해 보자. 불가에서 말하는 깨달음은 적멸(寂滅)이다. 즉 나라는 의식의 적멸을 통해 내 속에 남을 품을 공(空), 즉 ‘여백’을 가지게 된다. 유가에서는 이것을 중용이라고 부른다. 극단적인 위아주의와 극단적인 박애주의 사이에서, 저울처럼 미세한 떨림을 통해 균형이 이루어진다. 중(中)은 고정된 것이 아니다. 달려지는 물건, 저울대와 이것을 들고 있는 사람이 균형을 이룰 때까지 저울추는 중(中)을 찾아 이리저리 옮겨다닌다. 이 때 찾아진 균형이 바로 양극단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자연지중(自然之中)이다. 나와 너 사이에서 찾아진 곳, 나도 아니고 너도 아닌, 그러나 또한 나이기도 하고 너이기도 한 자리, 이것이 바로 중(中)이다. 이 자리에서 바로 나와 너가 소통하고 어울릴 수 있다. 섞여 어울리지 않고 생명은 유지될 수 없다. 이것이 생명의 비밀이다.

변화경영전문가 bhgoo@bhg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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