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서 만난 삼국유사]'잠든 역사' 노을 속으로

  • 입력 2003년 10월 23일 17시 1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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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경주시하면 황남동이고, 황남동하면 황남빵이다. 경주에 다녀오는 사람 치고 황남빵 한 봉지 들지 않으면 허전하다.

그러나 어찌 황남동이 빵으로만 기억되겠는가.

황남동은 천마총 때문에 이름을 날린 대능원의 입구가 있고, 대능은 경주 시내 크고 작은 왕릉들의 출발점과 같은 곳이다. 적어도 황남동은 신라 왕릉의 자존심과 함께 살아 있다.

경주의 왕릉이 특별하게 다가오는 것은 무엇보다 사람 사는 거리의 한 가운데서 마치 산 사람과 함께 하듯 서 있는 모습 때문이다.

풍수지리와 중국식 예제(禮制)가 자리 잡는 신라 중대 이후에는 왕릉이 도성에서 멀어지거나 산으로 올라가지만, 초기 왕릉일수록 반월성을 둘러싸고 있어서, 지금은 주거지와 왕릉이 뒤섞여 있기까지 하다. 대능원은 물론이려니와, 고분공원은 더욱 그렇다.

반월성을 출발하여 미추왕릉을 저만치 두고 걸어본다. 낙타등처럼 보이는 황남대총이 가을 햇살을 받아 더욱 빛난다. 그 능의 곡선은 지극히 평안하다.

오늘은 대능원과 고분공원을 묶어서 걸어 다니려 나섰지만, 이와 달리 낭산 아래 고분군을 묶어 돌아볼 수도 있겠다.

낭산 아래 고분군은 경주 시내에서 동쪽에 위치해 있다. 보문관광단지로 가는 4번 국도를 따라가다 중도에 지방도로로 접어들면 먼저 진평왕릉이 나온다. 이곳을 거쳐 낭산을 돌아 7번 국도를 만나게 되는데, 울산 쪽으로 조금 가다보면 사천왕사터가 나오고, 이 근처에 선덕여왕릉, 신문왕릉, 효공왕릉 등이 모여 있다.

시인 박노해가 진평왕(579∼631)의 능을 보고 쓴 글이 떠오른다.

“안으로는 왕릉의 위용과 기품을 잃지 않으면서도 소담하고 온화하고 유순한 사람의 인품이 우러나오는 듯한 정서가 있는 왕릉.”

그것이 어디 진평왕릉뿐이겠는가. 초가지붕의 곡선을 닮은 완만한 기울기의 왕릉들을 스쳐 지나가 보라. 경주의 왕릉은 어디나 위용과 온화한 기품이 넘친다. 박노해가 경주교도소에 갇혀 있을 때의 암울한 심정을 감안하며 앞 글을 곱씹어 읽어보면, 사실 그는 진평왕릉을 빌려 스스로의 마음을 다잡아 보고 있다는 느낌이다.

(왼)김유신의 집터라고 전해오는 재매정. 우물과 비각이 남아있고 한쪽에는 집터에서 발굴한 주춧돌을 쌓아두었다. 반월성에서 최씨고택을 지나 남천을 따라 서쪽으로 5분쯤 걸어가면 나온다. 박혁거세의 부인인 ‘알영’이 태어났다는 우물 ‘알영정’. 울창한 대숲 속에 우물과 비각이 남아 있다. 재매정에서 경주IC 쪽으로 10분 정도 걸으면 나오는 오릉 안에 있다.

진평왕의 딸이 선덕여왕(632∼646)이거니와, 널리 알려진 ‘선덕여왕이 절묘하게 알아차린 세 가지 일’ 가운데 비교적 덜 알려진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어보면, 신라인들이 죽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를 알게 된다.

‘여왕이 아직 병이 없을 때’였는데, ‘도리천(도利天) 가운데 묻어달라’고 한다. 하늘에다 묻어달라는 말인가? 여왕은 빙그레 웃으며 ‘도리천은 낭산의 남쪽에 있다’고 덧붙인다.

그래서 낭산 양지 바른 곳에 묘를 만들었는데, 문무왕(661∼680)이 즉위하여 바로 아래 사천왕사를 짓는다.

사천왕 하늘 위에 도리천이 있다고 불경(佛經)에서는 말한다. 그러므로 선덕여왕은 자기 무덤 아래 사천왕사가 지어질 줄 알았다는 것이 된다. 정작 중요하기로는 도리천 하늘에 있으면서 후손들을 지키려는 여왕의 그 정신이겠지만 말이다.

왕들의 노심초사는 릴레이처럼 이어진다. 문무왕은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노라고 바다에 장사 지내달라 하지 않았는가. 하늘로, 바다로 사라지면서 혼은 끝내 자손과 그들이 사는 나라 옆에 있었다.

글=고운기 동국대 연구교수 poetko@hanmail.net

:촬영노트: 반월성에서 계림을 지나 대능원 쪽으로 걷다보면 여기저기 앉아 있는 큼지막한 고분들이 눈에 들어온다. 이 고분들을 어떻게 찍으면 가장 좋을지 고민하다가 멀리 떨어져서 이리저리 걸어다니며 고분과 고분이 그려내는 다양한 모습을 담아 보았다. 어떤 자리에 서면 두 개의 고분이 적당히 떨어져서 아담한 젖가슴을 그려내고, 조금 자리를 옮기면 세 개의 고분이 겹치면서 경쾌한 리듬을 만들어 내고, 또 조금 더 걷다보면 멀리 있는 산들에 둘러싸인 높고 낮은 고분들이 정겨운 시골 마을로 다가선다. 어느 날에는 문득 능위에 올라가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에 해질녘 봉황대 위에 올라가본 적도 있다. 동쪽의 금강산, 남쪽의 남산, 서쪽으로는 선도산이 감싸 안은 경주 시가지 불빛들의 고즈넉한 모습과 단석산 위로 번져오는 저녁노을에 정신이 팔려 한참 만에 내려왔다.

양 진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tophoto@korea.com

대능원과 반월성 사이에 있는 계림. 그리 크지 않은 숲이지만 오래 묵은 큰 나무가 많다. 경주 시내에서 가장 조용한 곳으로 충담사의 향가 ‘찬기파랑가’를 새긴 향가비와 기념비각 그리고 내물왕릉이 있다.

미추왕(262∼283)은 김알지의 후손으로 김씨 성을 가진 첫 번째 왕이다. 23년을 다스리다 죽자 흥륜사 동쪽에 장사지냈다는데, 바로 지금 대능원 안의 한 쪽이 그곳이다.

경북 청도를 중심으로 세력을 뻗치고 있던 이서국(伊西國)의 군대가 경주까지 쳐들어 온 것은 바로 다음 왕 때였다. 이서국의 군대는 강했다. 신라군이 힘에 부쳐 밀리는 상황인데, 갑자기 귀에 대나무 잎을 꽂은 병사들이 달려와 도와주는 것이 아닌가. 상황이 끝나고 보니 병사들은 온 데 간 데 없고 미추왕의 능 앞에 대나무 잎이 수북이 쌓여 있더라나.

세월은 흘러 혜공왕(765∼779) 때였다. 김유신의 무덤에서 장군 같은 사람이 나와 말을 타고 달려가 미추왕릉으로 들어갔다. 얼마 있다 무덤 안에서는 한바탕 울음소리가 섞인 하소연이 들려온다. 바로 김유신의 혼령이었다.

그의 후손들이 가혹한 형벌을 받아 섭섭한 마음 그지없어 이제 멀리 떠나겠다는 것이었다. 미추왕의 혼령은 극구 말린다. “오직 내가 그대와 더불어 나라를 지키지 않으면 백성들은 어디로 가란 말이오.” 왕의 간절한 청에 김유신이 몰고 온 회오리바람이 멈추었다고 ‘삼국유사’에서 일연은 쓴다.

그래서일까, 신라 초기 왕 가운데 미추왕이 희귀하게 제 이름의 능을 분명히 알려주며 오늘날까지 전해진다.

봉황대가 있는 노동동 노서동 일대의 고분공원 쪽으로 발걸음을 옮겨본다. 이곳이야말로 경주 왕릉 자체만 아니라 그 발굴의 역사를 웅변한다. 실로 신라의 역사는 이 조그만 지역 안에 그 정수(精髓)를 담고 있다.

대능원이 지나치게 깔끔하게 보수되어 있다면 고분공원은 다소 방치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크고 작은 봉분들은 주변 동네 아이들이 미끄럼 타는 놀이터요, 봉황대 여기저기에는 느티나무가 우람차게 제자리인 양 서 있다. 하기야 옛날 사진을 보면, 봉황대는 능이 아니라 작은 동산처럼 나무로 뒤덮여 있었고, 다른 봉분은 민둥산처럼 버려져 있던 것에 비하면 그나마 나아진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고분공원의 능들이 좋다. 이 동네에서는 문밖에 나서면 왕릉이다. 옛 왕들이 다른 곳에 가지 않고, 이제껏 그 시절 사람들의 염원을 모두 안은 채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

▼주변에 가볼만한 곳▼

경주시 안팎의 고분만 보자고 여행을 떠날 수 있겠다. 고분은 물론 왕릉뿐만이 아니다. 이름을 알고 모르는 수많은 봉분들이 경주의 매력적인 풍경을 이룬다.

대능원과 고분공원을 둘러보는 출발점으로 반월성을 잡으면 좋겠다. 반달 모양의 성이라는 이름의 반월성은 지금 무너진 황성(荒城) 그 자체이지만, 그것은 그것대로 쓸쓸한 느낌의 역사를 전해주는 아름다움이 있다. 굳이 억지 재건을 해놓느니 쓰러진 모습에서 세월의 무상함을 느껴보는 일도 뜻 깊다.

반월성 안에 유일하게 석빙고가 유적으로 남아 있는데, 신라시대에도 얼음 창고가 있었던 것은 분명하지만, 이 석빙고는 조선시대 후반에 지은 것이라 한다.

성에서 계림 쪽으로 나서는 길이 있다. 신라 김씨계 왕의 시조가 되는 김알지가 금빛 나는 궤짝에 실려 내려왔다는 곳이다. 조선 후기의 문인관료 남공철이 세운 기념비각과 내물왕릉도 있다.

이곳을 지나 대능원 쪽으로 가다보면 첨성대를 만난다. 첨성대는 천문대로 가장 널리 알려져 있지만, 지붕의 우물 정(井)자 모양을 그대로 받아들여 우물신앙의 어떤 상징물이 아닌가 보는 이도 있다. 우물이야말로 생명의 근원이요 생활의 근거이다.

한편 고분공원을 나와 형산강 건너 송화산 아래에는 김유신 묘가 있고, 4번 국도를 따라 건천 쪽으로 가다보면 나타나는 선도산 아래 또 다른 일군의 고분군들을 만난다. 서악동 고분군이 바로 그것인데, 여기에 태종무열왕릉이 있다. 선도산에는 성모사(聖母祠)와 함께 마애삼존불이 유명하고, 건천에 거의 다 이르러서는 금척리 고분이 나온다.

아예 좀더 멀리 가보자면, 7번 국도를 타고 울산 방향으로 가다 경주시계를 막 벗어난 지점에 있는 괘릉을 볼 수 있다. 괘릉이야말로 신라 왕릉 가운데 가장 잘 갖추어진 능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이번에는 반대로 7번 국도의 포항 방향으로 가다 경주시청 앞에서 갈라지는 927번 지방도를 타고 가정리에 이르면 최제우 선생의 생가와 묘, 그리고 용담정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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