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방형남/직업 세탁

  • 입력 2002년 5월 29일 18시 21분


시대에 따라 꼭 알아야 할 어휘들이 있다. 5년 전 우리나라가 경제위기에 빠져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을 받은 뒤에는 영어 공부라고는 한 적이 없는 시골의 노인들까지 국가의 장래를 걱정하려면 영어로 된 국제기구 명칭 ‘IMF’ 정도는 입에 올려야 했다. 최근에는 원래 문이라는 뜻의 게이트(gate)가 대형 권력형 비리를 의미한다는 것쯤은 알아야 신문을 읽을 수 있고 다른 사람들과의 대화에도 끼어들 수 있다. 특정 시점의 세태를 반영하는 이런 단어들을 유행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6·13지방선거를 계기로 익혀야 할 어휘가 하나 더 늘었다. ‘직업 세탁’이라는 생소한 단어다. 후보 등록을 할 때 직업란에 본업이 아닌 다른 직업을 적어 넣는 일부 후보들의 행태를 일컫기 위해 언론이 만들어낸 조어(造語)다. 모텔과 단란주점을 운영하는 한 후보는 관변단체 회장과 학교 운영위원으로 직업 세탁을 했다고 한다. 오락실 주인은 노인회 회장으로, 술집 사장은 지역 청년단체 대표로 직업을 바꿔 신고했다. 전과기록 등을 숨겨 ‘이력세탁’을 한 후보도 많다고 한다.

▷더러운 것을 깨끗하게 한다는 뜻의 세탁이라는 번듯한 단어가 속속 부정적 의미의 어휘를 만들어내는 것은 아이러니다. 돈과 세탁이 결합해 만들어진 ‘돈세탁’은 떳떳하지 못한 돈의 출처를 감추기 위한 행위를 가리키는 단어로 오래 전부터 국제적으로 통용되고 있다. 직업 세탁 또한 부정적 의미로 다가온다. 본업을 숨기고 가공의 직업을 내세운 후보는 무언가 켕기는 게 있어 그랬을 것이다. 후보 스스로 지방자치단체장이나 지방의회 의원이 되기에는 부족한 직업을 갖고 있다고 고백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렇지 않아도 이번 지방선거가 사상 유례 없는 불법 혼탁선거가 될 것이라는 전망이 벌써부터 나오고 있다. 28일까지 경찰이 적발한 선거사범은 2505명으로 98년 지방선거 때와 비교하면 7배 가까이 늘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적발된 사람도 벌써 4년 전 적발 건수의 8배를 넘었다. 대부분의 후보들이 번듯한 외모에 평균 수준을 넘는 학력과 경력을 자랑하는 훌륭한 인물처럼 보이는데 왜 이런 결과가 나올까. 직업 세탁을 해서라도 자신의 부끄럽고 어두운 얼굴을 가린 후보들이 많기 때문은 아닐까. 그 어느 때보다 참 후보를 고르는 유권자의 안목이 필요한 시대라고 하겠다.

방형남 논설위원 hnbh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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