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전진우]축구가 뭐기에

  • 입력 2002년 5월 24일 18시 4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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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에서 북한이 ‘동양의 진주’ 박두익의 결승골로 이탈리아를 꺾고 8강에 진출했을 때 남한의 군사정권은 이탈리아 못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충격의 질로 따지자면 박정희 정권 측이 더했을지도 모른다. 이탈리아 축구팬들이야 며칠 밥맛을 잃거나 홧김에 부부싸움을 하고 나면 그만이겠지만 남한의 박 정권으로서는 그 정도로 때우고 넘어갈 수 없는 ‘체제의 문제’였다. 요즘 생각으로는 축구에 웬 체제? 하겠지만 그 무렵에는 그렇게 여유 부릴 처지가 아니었다. 당시만 해도 북한의 사는 형편이 남한을 앞지르고 있었고 김일성 정권은 그것을 체제 우월성으로 포장하던 때였다.

▼˝하루 세끼 갈비 먹이라˝▼

특히 유럽에서의 북한축구 선풍은 북에 요긴한 선물이었다. 북은 오래 전부터 유럽의 남한 유학생들 포섭에 공을 들이고 있었는데 축구가 그들의 북에 대한 관심도를 부쩍 높여준 것이다. ‘동백림사건’이 터진 것은 공교롭게도 바로 1년 뒤였다. 1967년 7월 중앙정보부가 발표한 ‘동베를린을 거점으로 한 북괴대남적화공작단사건’이 그것이다. 이 사건은 그 무렵 ‘6·8부정선거’를 규탄하던 대학가 시위를 단숨에 잠재웠다. 다소 논리를 비약시킨다면 박두익의 결승골은 남한 군사정권의 체제 안정에도 선물이 된 셈이다.

아무튼 북한이 이탈리아를 꺾고 8강에 진출하자 박정희 정권은 남한 축구도 이대로 두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축구 근대화’를 국가사업의 차원으로 끌어올린 것이다. 김형욱의 중앙정보부가 총대를 멨다. ‘음지에서 일하며 양지를 지향한다’던 정보부 부훈에서 따온 ‘양지(陽地)팀’은 1967년 2월 그렇게 탄생했다. 김호(수원 삼성 감독) 김정남(울산 현대 감독) 이회택(전남 드래곤즈 감독) 등 당시 최고선수들이 양지 유니폼을 입었다.

1969년 10월 12일 서울에서 열린 멕시코월드컵 예선전 일본과의 경기. 전반에 두 골을 먼저 넣었던 양지팀이 후반에 두 골을 먹고 무승부로 경기를 끝내자 마침 이 경기를 관전하던 박정희 대통령이 옆에 있던 김형욱 정보부장에게 한마디했다고 한다.

“우리 선수들이 제대로 먹지 못한 모양이군.”

대통령의 핀잔을 들은 김 부장은 그 날로 즉시 양지팀 선수들에게 “하루 세끼 갈비를 먹이라”고 특별지시를 내렸다고 하니 당시로는 굉장한 특혜였을 것이다.

30여년 세월이 흐른 2002년 5월 21일 저녁 서울 세종로 네거리. 한 무리의 ‘붉은 악마’들이 동아일보 대형 전광판 건너편에 모여 북을 치기 시작했다. 제주 서귀포에서 열린 한국-잉글랜드전의 중계화면을 보며 그들은 간단없이 ‘대한민국’을 외쳤다. 후반 6분 박지성의 다이빙 헤딩슛이 잉글랜드 골문을 가르자 서울 한복판은 그들의 환호로 떠내려갈 듯싶었다. 그들은 경기가 끝난 후에도 밤늦게까지 북을 치며 ‘대한민국’을 연호했다.

대통령의 아들들 비리에 종류조차 헤아리기 힘들 정도의 온갖 ‘게이트’ 부패로 만신창이가 된 대한민국, 새로운 대통령후보들에게 내일의 희망을 걸어본다지만 아무래도 한구석이 빈 듯한 대한민국, 앞으로 10년 동안 무엇으로 벌어먹고 살아가야 할지 돌아볼수록 가슴이 답답해지는 대한민국, 그런데도 젊은 그들은 목청껏 ‘대한민국’을 외쳐댄다. 축구가 뭐기에.

하지만 젊은 그들의 ‘대한민국’ 사랑마저 없다면 이 재미없는 세상에 어디 정 붙일 곳이 있을까 생각하면 축구는 대단하다. 사상 처음으로 16강 진출에 성공했을 때 쏟아질 국민의 환호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축구는 위대하다. 하나의 골로 순식간에 국민 통합을 이뤄내는 축구는 경이롭다.

▼부패한 권력에 줄 선물 없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축구가 권력에 선물을 줄 수는 없다. 월드컵 열기를 빌미로 권력의 부패 비리를 적당히 덮어가려 한다면 젊은 그들의 ‘대한민국’ 사랑을 모독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해를 넘겨 계속되는 부패 시리즈에서 축구로 눈을 돌린들 그것은 전혀 그들의 잘못이 아니다. 그들은 너무 지긋지긋해서 잠시 축구에 기대어 쉬고 싶을 뿐이니까. 그들이 쉬는 동안에도 검찰과 언론은 쉴 수 없다. 권력 부패를 도려내지 않고는 축구가 그 어떤 멋진 선물을 선사해 준다고 해도 내일의 희망을 노래할 수는 없으니까. 아무리 ‘대한민국’을 목청껏 외쳐 부른들 공허한 메아리로 돌아올 테니까.

내일 저녁 우리의 태극전사들이 세계 최강 프랑스와 마지막 평가전을 갖는다. 젊은 그들은 다시 ‘대한민국’을 연호할 것이다. 그것은 병든 대한민국을 일으켜 세우는 소리다. 내일의 희망을 만들어가는 활력이다. 부패한 권력을 부끄럽게 하는 외침이다. 축구의 힘이다. 정말 축구가 뭐기에.

전진우 논설위원 youngj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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