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세계화시대에도 국가는 건재 '국가 몰락의 신화'

  • 입력 2002년 5월 24일 17시 25분


국가 몰락의 신화/린다 위스 지음 박형준 김남줄 옮김/346쪽 1만6000원 일신사

입영통지서나 세금고지서를 받아들 때에야 어렴풋이 국가의 존재를 의식하는 사람들에게 “국가 자율성의 상실, 초국적자본 앞에서 정부의 무력함, 조직원리로서의 국민국가의 퇴화 등은 국가 부정의 형태들”이라는 설명은 얼마나 이해될 수 있을까? 더욱이 “국가 부정은 국내와 국제 무대에서 권력주체로서 국가의 축소나 배제를 미리 알리는 논제가 확산됨을 뜻한다. 이들은 ‘복지국가의 붕괴’와 ‘산업정책의 소멸’로부터 ‘국가적 다양성의 종말’과 ‘국민국가의 소멸’에 이르기까지 넓은 범위에 걸쳐 분포한다”는 소위 ‘국가론’의 난해한 문장을 이해해야만 현대세계의 국가를 제대로 인식한다고 할 수 있을까?

‘생산적 복지’와 ‘작은 정부’는 실제로 양립하기 어렵다는 점을 굳이 알려고 하지도 않는 세상, 언어와 재정상의 불편말고는 해외여행에 그다지 제재를 받지 않는 세상, 기업인들의 단체가 다음 선거에서는 이러저러한 사람이 선출되어야 한다고 떠들어댈 수 있는 세상이다. 이런 세상에 사는 사람들에게 그래도 현대세계에서 국가는 여전히 중요하고 또 기업들을 이끌면서 세계화의 풍파를 주도적으로 견뎌낼 능력이 있다고 강변해 봐야 얼마나 설득력이 있을까?

오늘날 이론으로서의 국가는 학문적 진화와 분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이미 단순한 도식적 설명의 틀을 벗어난 지 오래다. 현실로서의 국가는 왜소화와 퇴화의 과정을 겪으면서 그 존재감을 느끼게 하지 못하고 있다. 이론은 복잡해졌지만 현실은 단순해진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저자는 복잡한 정치경제학의 설명 양식과 용어들을 가지고 “국가는 여전히 존재한다”는 간단한 사실을 학문적으로 설명한다. 그렇다고 해서 영토 내의 시민사회와의 관계의 틀 속에서 국가는 무엇이며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에 대한 해답을 구하려 했던 전통적 국가론을 다시 불러들이지는 않는다.

다만 국경이 무의미해지는 세계화의 시대에도 경제적 외압을 극복하는 데는 ‘국가와 기업의 관리된 상호의존’이 중요하다며, 여전히 그라운드에 남아 있는 국가를 퇴장시키지 않을 뿐이다. 따라서 이 책은 국가에 대한 정의(定義)를 내리려 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의 능력과 그 변형(새로운 환경에의 적응과정)에 관한 논의를 전개하려고 하는 것이다.

7개의 장 가운데 앞 뒤 2개씩의 장을 제외한 3, 4, 5장은 동아시아, 스웨덴, 독일 및 일본의 ‘국가’를 논의하고 있지만 이는 논리 전개를 위한 사례연구이다. 즉 국가의 몰락 혹은 권력 없는 국가란 그야말로 ‘신화’일 뿐(제목)이며, ‘세계화시대의 경제운용’(부제)은 국가의 정책적 능력에 좌우된다는 나머지 장들의 논지를 뒷받침하기 위한 부분이다. 동아시아 발전‘국가’들의 국가‘권력’은 지난 세기말의 금융위기 극복의 원동력이었고, 스웨덴과 독일 그리고 일본에서도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세계화에 대한 대응은 국가의 역사적 특수성과 축적에 의해 다르게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런 논지의 소유자에게 세계화는 전혀 새로운 현상이 아니며 변화하는 환경에 대한 국가의 적응능력의 시험대 이상의 의미를 갖지 않는다.

요컨대 이 책은 영, 미의 자유주의적 국가관에 대항하면서, 통일적 세계화에 대해 (다종 다양한)국가 중심의 반론을 제기한다. 금융자본의 유동성과 같은 세계화의 기본현상을 부인하지 않으면서도 그것이 전혀 새로운 것도 압도적인 규모로 다가오는 것도 아니라는 점을 실증적으로 보여준다.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현대는 생산과 소비, 금융과 투자가 균등하게 이루어지는 통합된 세계로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 국가가 중심이 된 통합, 국가들 사이의 관계의 변용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세계화’라는 용어 대신 ‘국제화’라는 말로 표현한다.

이 책은 영미식 자유주의 국가관에 대한 대항의 논리를 그 바탕으로 하면서도 후발선진국의 보호무역주의나 제3세계의 신흥공업국 이론을 재탕하지 않는다. 국가와 사회의 권력관계를 재조명하면서도 국가조합주의나 사회적 조합주의에 머물지 않는다. 국가 자율성의 영역을 확보해 주기 위해서 국가의 구조와 사회의 구조 그리고 나아가 국가와 산업과의 조직적 연관성으로 논리를 발전시켜 나가며, 그 과정에 국가의 정책형성 수단과 변형(적응)능력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행정부와 관료조직 그리고 그것을 구성하는 통치엘리트 집단은 실체로서의 국가라고 할 수 있지만, 사실 국가는 사회의 다른 집단이나 대외적으로 다른 국가와의 관계 속에서만 그 존재를 파악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정통성의 이데올로기를 장착해야 진정한 국가라고 할 수 있다는 단계에 이르면 국가는 일종의 픽션이 된다. 픽션의 현상과 능력에 대한 비교분석은 도식적인 비교제도론의 범위를 벗어나야 한다. 저자는 그것에 성공하고 있으며 나아가 때로는 계량적 수치를 가지고 추상성을 논박하거나 자신의 논리를 뒷받침한다.

“그래서 뭐 어쨌다는 거냐?”라는 천박한 질문에 난감해 하는 일반적 국가론의 결론과는 달리 “이렇게 한번 해보면 어떨까?”라는 식의 실질적인 정책의 힌트를 제공하고 있다는 점에서 난해한 이 학술서를 독파하는 의미를 찾을 수 있다.

그러나 교양서로 접하고자 하는 일반인이 이해하기 어려운 용어나 개념을 적절한 설명 없이 사용하는 학문의 오만을 감지할 수 있는 부분이 적지 않다. 게다가 “2년여의 시간”을 공들였다는 번역인 만큼 역자들은 원저에 충실한 어휘를 찾아 가능한 한 오해를 사지 않기 위해 직역에 충실한 것으로 보인다.

그만큼 중량이 느껴지고 현학이 배어있지만, 읽는 도중에 원서의 문장이 자주 궁금해지는 번역은 훌륭한 번역이라고 할 수는 없다. “동쪽 통합”이라든지 “국가의 구조를 넘어 나아갔다”라는 표현은 의미를 이해하기 어렵고, “이켄베리가 적어둔 것처럼, 국가의 경제운용기술 변천의 증거는 국가능력의 핵심이 정책수단들을 변형하는 바로 그 능력이라는 것을 시사한다”라는 문장은 세련되지 못하다. “전세계적 금융시장은 전능하여 정부들에 재정적 보수주의(‘무력성’으로 읽어라)를 강요한다”와 같은 문장도 마찬가지이다. 번역의 목적은 계몽에 있고, 번역서를 읽는 목적은 좌절감이 아닌 지적 성취감의 획득에 있다.

이웅현 고려대대학원 연구조교수·국제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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