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원논설위원칼럼]김우상/˝공부하지 않았습니다˝

  • 입력 2002년 5월 16일 18시 49분


‘노풍(盧風)’을 일으켜 당선된 민주당 노무현 대통령 후보의 지지율이 떨어지고 있다. 최근 MBC가 한국갤럽에 의뢰해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에 의하면, 노무현 후보와 이회창 후보의 지지율 격차가 10% 이내로 좁혀졌다.

노 후보는 14일 관훈클럽 초청토론회에 참석해 정국 현안과 주요 이슈에 관한 자신의 입장을 표명함으로써 지지율 하락을 만회할 기회를 가졌다. 그러나 노 후보가 그 기회를 잘 활용한 것 같지는 않다.

노 후보는 최근까지도 그랬듯이 관훈클럽 토론에서 답변이 ‘말 바꾸기’라고 비난을 받을 만한 소지가 있는 질문들을 특유의 얼버무림으로 회피했다.

▼노후보 통일문제 왜 얼버무리나▼

예를 들어, 민감한 이슈인 통일방안에 대한 질문에 “깊이 관심을 갖고 공부하지 않았다”는 식으로 대답했다. 중도성향의 유권자들은 노 후보가 특정 이슈에 대해 뚜렷한 입장을 밝히지 않은 것에 대해 노 후보가 자신들의 견해와는 다른 진보적 시각을 갖고 있지만 이를 드러내 보이지 않으려 한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또 노 후보를 지지해온 진보성향의 유권자들은 노 후보가 자신의 입장을 명확하게 밝히지 않은 것에 대해 실망하고 회의를 느꼈을 수도 있다.

물론 보수성향의 유권자 중 애당초 색안경을 끼고 노 후보의 토론 결과를 지켜본 사람들은 별다른 심경의 변화가 없었을 것이다.

노 후보는 앞으로도 자신의 입장을 밝힐 수 있는 기회가 많다. 그러나 기회가 있을 때마다 정책노선을 명확히 밝힐 수도 없는 입장이다. 여태까지 견지해온 진보적 입장을 중도적인 입장이나 이회창 후보와 별 차이가 없는 정책대안으로 바꿔 표명할 경우 현재 자신을 지지하고 있는 유권자들로부터 외면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중도성향이나 보수성향의 유권자들의 일부는 ‘말 바꾸기’를 한다고 노 후보를 외면할 수 있다.

그러니 노 후보는 정책노선을 명확히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계속 얼버무릴 수도 없는 딜레마에 빠져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사실 선거 전략적 판단에 의하면 이는 딜레마가 아니다. 노 후보는 특정 이슈에 대해 종전의 입장을 고수하건 입장을 바꾸건 간에 입장을 명확히 하는 것이 유리하다.

우리 사회는 이미 민주화 및 다원화 과정을 성공적으로 거치고 있다. 민주화되고 다원화된 사회의 일반적인 특징은 다수 시민이 중도적 입장을 견지하고, 진보성향과 보수성향의 시민들은 상대적으로 소수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우리 사회 역시 이러한 일반적인 특징을 지니고 있다고 할 때 노 후보는 더 많은 표가 모여 있는 중도노선 쪽으로 자신의 입장을 재정리하는 것이 전략적으로 훨씬 유리하다.

물론 ‘말 바꾸기’를 불신하는 이들과 입장 변화에 실망한 이들은 노 후보를 떠날 것이지만 새로이 얻을 수 있는 표와 비교해보면 잃는 표수는 제한적일 것이다.

노풍을 일으킨 주역들이 반드시 진보성향의 20, 30대 젊은이들에 국한되어 있는 것은 아닌 걸로 보인다. 부정부패로 물든 ‘게이트’정국에 진저리가 난 많은 시민들이 참신해 보이는 노 후보를 지지하기 시작했던 것이 노풍의 근원지였을 수도 있다.

이제 노 후보가 스스로 중도성향의 참신하고 믿을 만한 정치인이라는 이미지를 유권자들에게 심어줄 수만 있다면 떨어지고 있는 지지율을 만회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노 후보는 이회창 후보가 표방하는 정책대안이 지극히 보수적이기를 바랄 것이다. 그래야만 이 후보가 보수적인 수구세력이라고 몰아세우고 노 후보 자신이 다수를 대변하는 중도노선에 더 가깝다고 선전할 수 있을 게 아닌가.

▼중요이슈 입장 명확히해야▼

물론 이 후보 진영에서도 이를 모를 리 없다. 이 후보 역시 노 후보가 표방하는 정책대안이 진보적인 것이기를 바랄 것이다.

그래야만 노 후보가 급진적 개혁세력이라고 몰아붙이고 이 후보 자신이 다수를 대변한다고 홍보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앞으로 남은 6개월 동안 노 후보가 국가 생존과 직결된 통일 및 안보 문제 등 중요한 이슈에 대해 명확한 견해를 표명하지 않는다면 지지율은 계속 추락할 가능성이 높다.

이회창 후보는 곧 있을 관훈토론과 같은 정책토론회에서 어떻게 나올까. 이 후보의 관훈토론 퍼포먼스를 지켜볼 일이다.

김우상 연세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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