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 2002 대선후보 검증 제1부]<2>변호사 시절

  • 입력 2002년 5월 13일 18시 02분


《동아일보는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대통령후보가 확정됨에 따라 양당 후보에 대한 검증 기획보도를 준비했다. 첫 번째로 ‘공인 이회창과 노무현’을 추적해 봤다. 두 후보는 시기와 기간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 판사 변호사 각료 정치인의 길을 걸어왔다. 동아일보는 유력 대선후보의 자질과 능력, 공약과 정책에 대한 검증작업을 12월 19일 대선 때까지 계속할 예정이다. 물론 최대한 객관성과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할 것을 다짐한다.》

▼이회창 후보

한나라당 이회창(李會昌) 대통령후보는 전두환(全斗煥) 정권 말기인 86년 4월 대법원 판사 재임용에서 탈락해 변호사 개업을 한다. 그의 첫 전직이었다.

88년 7월 대법관(헌법 개정으로 명칭이 바뀜)에 재임용될 때까지 2년 남짓한 기간의 이 후보에 대해서는 ‘굵직한 사건을 맡아 잇따라 승소한 잘 나가는 변호사’ ‘대법원 판사 출신의 점잖은 변호사’ 정도로 기억하는 사람이 많다.

▼글 싣는 순서▼

- ①무명 시절

다만 부인 한인옥(韓仁玉) 여사는 달랐다. 한 여사는 “변호사가 되고 나서 처음으로 집 같은 집을 마련해서 너무 좋았다”고 말하곤 했다.

실제로 이 후보는 변호사 시절 집안 정비에 신경을 쓴 흔적이 보인다. 다소 옹색했던 서울 휘경동 집에서 구기동의 풍림빌라로 옮기고, 경기 화성시에 선산용 땅도 산다. 모두 87년 하반기로 변호사 개업 후 1년 남짓 지나서다.

구기동 빌라는 97년 대선 직전 7억원에 팔렸다. 이를 기준으로 볼 때 매입가는 5억원 안팎이었을 것이라는 게 인근 부동산업소의 추정이다. 화성의 임야 7200평은 변호사 수입금 중 8000만원을 들여 구입했다는 것이 이 후보 측 설명.

이 후보의 변호사 사무장을 했던 이형표(李亨杓)씨에 따르면 이회창 변호사가 2년여 동안 수임한 사건은 50∼60건 정도이고, 승소율은 90% 정도로 수위를 달렸다고 한다. 대법원 판사 출신이라 전관예우를 기대하고 몰려드는 사람은 많았지만 사건을 가려 맡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사건당 어느 정도의 수임료를 받았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97년 대선 때 자민련이 문제를 제기했던 한국중공업 사옥을 둘러싼 현대와 한중 간의 소유권소송(95년 3월) 착수금으로 5000만원을 받은 것은 확인됐다.

당시 자민련이 제기한 거액의 이면 수임료 수수 및 탈세 의혹에 대해 이 후보의 측근인 진영(陳永) 변호사는 “이 사건은 비록 패소했지만 한중 측이 착수금 5000만원이 수임기준(소송가액 3000억원)에 비춰 너무 적으니 더 주겠다고 했으나 이 후보가 사양한 것으로 안다”고 해명했다.

이 논란은 이 후보 측이 자민련 사무총장이었던 강창희(姜昌熙·현 한나라당 소속) 의원을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다가 대선 이후 취하함으로써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95년에 맡은 매일유업과 농수산물유통공사 간의 평택목장 소유권소송(상고심)은 97년 대선후보가 된 이후까지 사임계를 제출하지 않아 대선 때 논란이 되기도 했다. 이형표씨는 “다른 사건은 모두 사임계를 냈는데 어찌된 일인지 이 사건만 누락돼 이 후보가 무척 화를 냈다”고 전했다.

이 사건 또한 51만평 규모의 목장(시가 2000억원)을 둘러싼 분쟁이었다. 이 후보의 수임과 관련해 논란이 된 두 사건 모두 소송가액이 수천억원대인 대기업들 간의 송사라는 점이 눈길을 끈다.

김영삼(金泳三) 정권 초기인 93년 3월 사상 처음으로 실시된 고위공직자 재산공개 때 감사원장이던 이 후보는 8억9500여만을 신고하고 비고란에 ‘변호사 개업 당시 소득과 저축을 기초로 취득한 것’이라고 적었다.

이 후보는 94년 9월 국무총리직에서 물러난 뒤 96년 초 신한국당에 입당할 때까지 1년 남짓의 두 번째 변호사 활동을 한다. 그 기간 중인 95년에 이 후보가 납부한 소득세는 3848만원(총수입 2억3800만원)이었다. 총리에서 물러난 직후엔 사건을 더 가려서 맡았다는 게 측근들의 전언이다.

한편 민주당은 금년 3월 이 후보의 화성 땅과 관련해 “87년 구입 당시 평당 1만원에서 현재는 20만원선으로 폭등해 시세 차익만 14억원에 이른다”며 투기의혹을 제기한 적이 있다.

그러나 인근에서 부동산소개 일을 하고 있는 장일용씨는 12일 현지에서 기자와 만나 “경사가 심해 묘지로밖에 쓸 수 없는 땅이고, 현 시세는 8만원인데 당장 개발을 한다고 해도 12만원을 넘지 않는다”며 이를 일축했다.

아무튼 이 후보가 첫 번째 변호사 개업을 했던 시절은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과 6월 민주화항쟁, 대통령직선제 개헌 등이 이뤄진 우리 현대사의 격변기였다. 하지만 그는 대법원 판사 때나 정치입문 후와는 달리 사회문제나 정치문제에 대해 그리 적극적이지 않았다.

이 시절 이 후보는 이영섭(李英燮·작고) 전 대법원장이 81년 신군부에 밀려 대법원장직을 물러나면서 “대법원장으로 재임했던 시절은 회한과 오욕의 나날이었다”는 퇴임사를 남긴 데 대해 비판을 가하기도 했다.

“나는 이 같은 말에 강한 반발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회한과 오욕의 나날이었다면 그와 같이 만든 것은 바로 그 자리에 있던 본인이지 다른 사람을 탓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87년 3월 서울대 법대 초청 강연)

박성원기자 swpark@donga.com

윤종구기자jkmas@donga.com

▼노무현 후보

민주당 노무현(盧武鉉) 대통령후보는 안락한 변호사의 삶을 누리고 있던 81년 7월, 우연히 ‘부림(釜林)사건’ 변론을 맡게 되면서 인생의 전기를 맞는다.

부림사건은 부산 지역 학생 재야운동권 인사 20여명이 독서클럽을 결성해 사회과학 서적을 읽고 토론하다 계엄포고령 위반으로 구속된 시국 사건.

노 후보가 이 사건을 접하게 된 것은 당시 부산지역 인권변호사의 대부였던 김광일(金光一) 변호사를 통해서였다. 그는 최장 57일간 구금된 상태에서 고문를 당한 피고인들을 접하면서 큰 충격을 받았다.

감정이 격앙된 노 후보는 재판이 열릴 때마다 검사와 삿대질을 할 정도로 격하게 변론을 했다. 그는 또 생소했던 시국사건 변론을 위해 피고인들이 읽었던 ‘금서(禁書)’들을 빠짐없이 읽었다. ‘전환시대의 논리’ ‘해방전후사의 인식’ ‘우상과 이성’ 같은 서적들이었다. 의식화의 첫 세례였다.

하지만 노 후보는 사건이 종결된 뒤 김 변호사에게 “시국 사건은 효과도 못 보고 재미가 없다”고 불평을 토로하기도 했다. 나름대로 열심히 변론했지만 대부분의 피고인이 징역 5∼7년의 중형을 선고받자 변호사로서의 보람을 느낄 수 없다는 얘기였다.

‘인권변호사 노무현’에 대한 평가는 사람마다 다르지만 그가 흥분을 잘하고 격하게 변론을 했다는 점에는 모두 동의한다.

82년 당시 부산지법 판사였던 서석구(徐錫九) 변호사는 “일부 판사들 사이에서는 노 변호사를 두고 ‘무슨 변호사가 저러냐’ 하는 말이 있었다. 피고인들의 주장을 그대로 대변하듯이 변론했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김광일 변호사도 “노 변호사가 너무 흥분을 잘 해 내가 ‘제발 감정을 가라앉히고 차분하게 변론하라’고 여러 차례 충고했다”고 말했다.

이즈음 노 변호사의 자세에도 많은 변화가 일어난다. 사건 소개인에게 수수료를 주는 일은 완전히 끊었고 판검사 접대도 거의 중단했다. 그는 88년 ‘내가 살아온 길’이란 글에서 그때를 이렇게 회고했다.

“부림사건을 맡고부터 나는 하루하루 양심과 욕망 사이를 오락가락하면서 갈등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갈등 속에서 하나하나 나의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요정이나 살롱에 발을 끊고 그렇게 좋아하던 요트 타기도 그만두었다.”

그러나 그는 돈 버는 일을 중단하지는 않았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는 인권변호사라기보다는 잘 나가는 조세전문변호사로서의 명성이 더 높았다.

84년엔 117억원짜리 상속세 소송을 맡아 전액을 취소시키는 승소판결을 이끌어내 일약 ‘조세사건 권위자’로 떠올랐다. 부산 상공회의소 회장을 지낸 원로 기업인인 삼화그룹 김지태(金智泰) 회장의 유족들이 부탁한 거액의 상속세 소송이었다.

김 회장이 설립한 부일(釜日)장학회의 장학금을 받아 겨우 부산상고에 진학할 수 있었던 노 변호사의 ‘보은(報恩)’이기도 했다. 당시 그는 승소사례금으로 1억여원을 받기로 돼 있었으나 4000만원만 받았다고 한다. 그래도 그는 이 한 건으로 착수금 2000만원을 합쳐 6000만원이나 되는 수입을 올렸다. 부산의 웬만한 아파트 한 채 값이었다.

노 변호사는 상고 출신답게 회계분야에 밝아 조세소송에서 승소율이 90%에 이를 정도였다고 한다. 그는 84년 한 해에만 조세사건 100여건을 포함해 400건 안팎의 사건을 수임했고 조세사건만 따지면 전국 최고 수준의 수임사건 수와 최고의 승소율을 올렸다는 평을 들었다.

당시 노 변호사의 사무장이었던 최도술(崔導術)씨는 “노동사건의 절반 정도는 무료 변론을 하거나 인지대만 받았다. 주수입원은 조세사건이었는데 적게는 건당 200만원이었고 많게는 몇천만원짜리도 있었다”고 말했다. 막대한 수입이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노 후보는 이렇게 번 돈 중 일부는 재야활동 지원에 쓰고 나머지는 여러 곳에 투자를 했다. 둘째형 건평(健平)씨가 85년과 86년 경남 김해의 임야와 밭을 살 때 각각 1500만원씩 대주기도 했다. 89년 건평씨가 김해의 밭 300평을 매입할 때도 2억5000만원을 댔는데, 이 중 120평은 나중에 노 후보의 몫이 됐다.

노 후보는 후배가 하는 요트공장 등 주변 사람들의 사업에도 투자를 많이 했다. 시집간 누나 2명과 건평씨의 자녀들이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의 학비도 모두 그가 댔다.

나중에 소득에 비해 세금을 제대로 내지 않았을 것이라는 의혹이 제기됐다. 이에 대한 노 후보의 해명은 “당시 관행에 따라 부산지방변호사회에서 할당하는 대로 냈다. 86년 본격적으로 재야운동에 투신하면서 경찰에서 나의 뒤를 캐 흠을 잡히면 안 되겠다 싶어 그때부터는 세금을 꼬박꼬박 냈다”는 것이다.

김정훈기자jnghn@donga.com

부형권기자 bookum90@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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