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문학의 사멸' 파헤치기 '나는 아주 오래…'

  • 입력 2002년 4월 19일 17시 31분


나는 아주 오래 살 것이다/이승우 지음/276쪽 8500원 문이당

‘이 궁핍한 시대에 시가 무슨 소용인가.’

18세기 독일 문인 횔덜린이 제기한 화두는 21세기 한국작가 이승우에게 있어서 보다 간단한 문장으로 환원된다. ‘소설을 쓰다니, 이런 시대에’(육화의 과정)라는.

그러나 문학에 대해, 나아가 책에 대해 묻는 두 사람의 물음은 상반된 조건을 전제로 한다. 횔덜린에게 있어서 문학에 가해지는 위협은 궁핍, 특히 자유의 결여와 자유의 궁핍에서 온다. 그러나 이승우에게 있어서 문학의 위협은 정반대로 ‘과잉’에서, 이 세기를 사는 인류의 재난이기도 한, 자유의 과잉과 선택권의 과잉에서 온다.

‘그저 환경이 바뀐 거예요. 소설 밖에서 지식욕을 채울 수 있는 채널들이 좀 많아졌어요? 눈과 귀와 머리를 즐겁게 해주는 자극적인 오락거리들은 또 어떻구요. 거기다가 지난 시대에 금기로 묶여 있던 것들이 와르르 풀려났단 말입니다. 억압된 욕망이란 이제 존재하지 않지요.’(육화의 과정)

그가 제기한 주제가 새롭거나 신선하다고 말하지는 못할 일이다. 그러나 1993년 대산문학상을 수상한 ‘생의 이면’에서 구원을 찾아 나아가는 한 인물의 내면을 그렸던 작가는 새 창작집 ‘나는 오래 살 것이다’에서 책과 문자의 전락과 사멸, 부패에 이르는 처절한 궤멸을 일찍이 시도된 바 없을 정도로 뿌리 끝까지 펼쳐보인다.

그의 책속에서 ‘책들은 웅성거리지 않는다. 책들은 이미 죽어 있다’(도살장의 책). 죽어있을 뿐 아니라 냄새를 풍기며 썩어간다. ‘자기네 집 책꽂이에서 부패해 가고 있던 책들을 갖다 버린 사람들이 어떻게 그걸 모르겠는가. 책들의 쓰레기장, 아니면 책들의 무덤?’

작품의 배경이 된 ‘새’ 도서관이 효용가치를 다해 기증받은, 사실상 버림받은, 책들의 무덤으로 계획되었다는 사실은, 그것이 도살장으로 가는 가축의 ‘계류장’ 터 위에 세워졌다는 사실과 함께 문자에 닥칠 잔인한 운명을 암시한 것으로 보인다. 횔덜린처럼 작가는 ‘강한 부정을 통한 강한 긍정’을, 문자와 문학의 효용에 대한 갱신(更新)에의 격려를 보내려 한 것일까, 아니면 철저한 모욕을 통한 반발의 갱신을 모색하려 한 것일까.

‘육화의 과정’은 기형의 술집 여주인에게 고용돼 ‘자기책 읽어주는 남자’로 전락한 소설가를 묘사한다. 책 말미에 실린 ‘책과 함께 자다’는 ‘책배달조합’ 최후의 배달인과 고객을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케이 양 비디오 또는 시디, 화끈한 걸로, 일본 성인 만화… 뭔지 알아요? 요새 내가 받은 주문들이에요.”

조선시대부터 5대를 내려온 책배달조합 최후의 배달인은 이렇게 독백한 뒤 며칠만에 보르헤스의 비의적 소설에서처럼 책 속에 갇혀 임무와 생을 마감한다. 남아있는 최후의 독자는 그의 방으로 가서 의무처럼 배달의 작업을 대행한다. 받을 사람이라곤 자기 밖에 없는 배달을.

그것이 문자와 문학의 운명일까. 발신인과 수취인이 동일한, 갇힌 고리(loop)를 고독하게 순환하며 덧없이 소멸해가는 것일까. 오늘날 이렇게 사변(思辨)과 상징으로 가득찬 소설책을 내놓는 것은 그러한 소멸에 대한 저항인가, 볼 것도 탐닉할 것도 눈을 빼앗길 것도 많은 시대에…. 책은 닫히고 질문은 남는다.

유윤종 기자 gustav@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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