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전진우]말에 베인 상처

  • 입력 2002년 4월 12일 18시 35분


‘말로 입은 상처는 칼에 맞아 입은 상처보다 더 아프다’는 모로코 격언이 요즘처럼 실감나는 때도 드물 터이다. 날 선 말들이 비수가 되어 심장을 찌르고 피를 흘린 이들은 다시 증오의 날을 벼린다. 사이버 공간은 욕설로 넘쳐흐르고 어느새 세상은 ‘적과의 전쟁’에 휩싸인다. 논리는 필요없다. 상대의 말이나 글을 끝까지 듣거나 읽는 최소한의 인내심도 거추장스러울 뿐이다. 그저 내 생각, 우리 집단의 뜻에 한 마디, 한 줄만 거슬리면 거친 욕부터 내뱉고 본다. 상대 의견에 대한 존중은 턱도 없는 소리다.

선거바람이 몰고온 세태의 끔찍한 단면이다. 알맹이 없는 좌우 논쟁에 말(言)들이 덩달아 날뛰고 있다. 이렇게 간다면 올 겨울 대선이 끝나고 그 누가 승자가 되든 ‘상처투성이의 영광’에 그칠 것이다. 나라 안이 온통 적대감으로 뒤덮일지도 모를 일이다. 오늘의 여야(與野) 정치지도자란 사람들은 그것을 두려워해야 한다. 상대에 대한 공격이 부메랑이 되고 그것이 자신은 물론 나라 전체에 치유하기 힘든 상처를 남길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논쟁의 격 이렇게 낮아서야▼

노무현(盧武鉉)씨와 이인제(李仁濟)씨는 제대로 된 논쟁을 통해 우리 정치의 격을 한 단계 높였어야 했다. 그들이 이른바 3김 시대 이후의 정치지도자라고 자임한다면 그런 시대적 요구와 국민 기대에 부응해야 했다. 그들은 ‘중도개혁정당’을 표방한 민주당의 대선후보 경선에 나선 인물이다. 그렇다면 중도개혁의 기본틀을 어떻게 정책으로 구체화해 나라를 이끌어나갈지 밝혀야 했다. 이념검증 또한 그런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지 못했다. 이 후보는 색깔론은 아니라고 하면서도 그쪽으로 몰아가려는 기색이 역력해 보였고 그에 대한 노 후보의 대응은 전반적으로 진지하지 못했다. 더구나 그는 불쑥불쑥 ‘정제되지 못한 말의 불안정성’을 노출했다. 이는 결코 ‘능란한 화술’로 덮을 문제가 아니다.

국가보안법 문제를 논쟁의 예로 들어보자. ‘국보법을 유지할 것인가, 개정 또는 폐지할 것인가는 오랫동안 논란이 돼온 문제다. 그런데 당신은 당장 없애야 한다고 한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견해를 밝혀달라.’ 적어도 이렇게 시작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대뜸 ‘국보법 폐지를 주장하니 당신은 좌파’라고 몰아세우고 ‘또 색깔 시비냐’며 발끈하는 식이어서는 논쟁의 격은커녕 싸움밖에 되지 않는다.

국보법에 대한 의견은 대체로 세 가지다. 첫째는 북이 근본적으로 변했다는 근거가 없는 마당에 국보법을 없애는 것은 우리만 서둘러 무장해제 하는 격이니 절대 안된다는 것이고, 둘째는 인권 유린의 가능성이 높은 일부 조항은 손질하되 큰 골격은 유지하자는 것, 셋째는 국제적으로 지탄을 받고 있는 악법이니 당장 없애고 필요하면 다른 법으로 대체하자는 것이다. 결국 국민 다수가 어느 쪽에 공감하느냐에 따라 결정될 문제다. 유지하자고 수구라고 비난할 일도, 없애자고 좌파라고 손가락질할 일도 아니다. 북에 대한 우리 국력과 체제 우월성을 자신한다면 이제 그럴 정도는 됐다. 그렇다면 좌파니 색깔이니 하며 소모적인 싸움을 하기보다는 진지한 문제 제기와 성실한 답변을 해야 옳다. 각자의 이념적 성향에 대한 판단과 선택은 유권자인 국민이 할 일이다.

이회창(李會昌) 한나라당 전 총재가 현정권을 ‘좌파적 정권’이라고 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적절치 못하다. 어떤 설명을 붙여도 ‘노풍(盧風)’을 겨냥한 정략적 표현이란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이 전 총재는 그보다는 미래를 얘기하며 국민에게 감동과 희망을 주었어야 했다. 변화를 바라는 민심을 읽어야 했다. ‘원조보수’ 다툼을 할 때가 아니다.

▼˝빨리 대선 끝났으면 좋겠다˝▼

보수와 진보는 상대적이고 가변적인 개념이다. 오늘의 보수가 어제는 진보였을 수 있고, 오늘의 진보가 내일은 보수가 될 수 있다. 예컨대 18세기 유럽의 자유주의는 진보였으나 19세기에는 보수가 됐다. 분명한 것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가 이 시대의 보편적 가치라는 점이다. 이 기본적 가치를 전제한 보수-진보라면 그것에 섣불리 좌-우의 색깔을 입힐 일은 아니다. 한국사회에서 좌우는 여전히 이분적 개념으로 인식되고 있으며 자칫 맹목적 적대를 부를 수 있기 때문이다.

벌써부터 많은 사람들이 8개월이 훌쩍 지나가 버렸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대선이 빨리 끝나버렸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이제부터라도 여야 대선 주자들은 세상을 갈라놓는 말을 삼가야 한다. 말은 권력의 수단이자 표현이다. 그러나 잘못 쓰면 권력 자신을 베는 것은 물론 나라와 국민에게 큰 상처를 입힌다. 진정 두렵지 않은가.

전진우 논설위원 youngj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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