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남찬순]동원정치와 ´정치실험´

  • 입력 2002년 3월 4일 18시 28분


나흘 후면 민주당 대선 주자들의 제주도 국민참여 경선 결과가 나온다. 풀뿌리 정치를 해보겠다는 민주당의 ‘정치실험’이 밀실정치 보스정치보다는 한결 신선해 보인다. 그러나 그 신선한 바람과 함께 동원정치라는 고질병이 암처럼 번지고 있다. 민주당의 ‘정치실험’에 어두운 그림자가 나타나고 있다.

‘2억원대 불법선거자금을 썼다’는 민주당 김근태(金槿泰) 고문의 ‘고백’은 별로 놀라운 것이 아니다. 누구나 ‘그러려니’ 하고 당연한 일처럼 생각해온 터다. 정치인치고 불법선거자금을 쓰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는가? 그럼에도 그의 ‘고백’은 관심을 끈다. 김 고문은 민주당의 ‘정치실험’도 이대로 가다가는 불법선거자금이 판칠 것이라는 우울한 예고를 하고 있다.

그렇지 않아도 이미 돈 얘기가 질펀하게 나오고 있는 마당이다. 제주도뿐만 아니라 전국 각 지역에서 누구는 몇 만명의 경선 참여 신청서를 받았고 누구는 몇 천명을 동원하고 있다는 말이 공공연히 거론된다. 이 같은 조직적 동원은 분명히 ‘돈선거’ ‘타락선거’를 불러오게 되어 있다.

▼동원이 불가능한 정치▼

미국 대통령선거의 예비선거가 처음 실시되는 뉴햄프셔주의 유권자 수는 70여만명으로 공화당원이 약 26만명, 민주당원은 20만명, 나머지는 무소속이다. 민주당 주자든, 공화당 주자든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판세를 뒤흔들 수 있는 작은 선거구다. 미국 대통령선거의 그 엄청난 자금력과 조직력에 비하면 그곳에서 자기 당 유권자 20만∼30만명을 조종하는 일은 아주 손쉬워 보인다. 그러나 미국의 역대 대선 주자들은 누구도 그렇게 하질 못했다. 동원이나 매표(買票)를 시도했다가는 유권자가 직접 고발해 해당 주자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주기 때문이다.

뉴햄프셔주 예비선거에도 물론 주자들의 개인 연설회가 있고 열렬한 지지그룹의 모습도 보인다. 그러나 대부분의 지지자들은 어느 후보가 그저 좋아서 돈 한푼 받지 않고 자발적으로 찾아와 봉사하는 사람들이다. 연설회도 조직적인 동원이 없다보니 청중수가 겨우 몇 백명 수준이다.

미국 대통령선거의 선거비용 내용을 봐도 조직적 동원이 없다는 사실이 확연히 드러난다. TV광고료가 전체 선거비용의 60% 이상을 차지하고 선거전문가고용과 여론조사비는 모두 합해야 20% 정도에 불과하다. 나머지 20%는 선거자금 기부금모집 비용이라고 한다.

조직관리비가 50% 이상을 차지하는 우리의 선거 풍토와는 대조적이다. 두말할 것 없이 그 주요 항목은 유권자 동원비일 것이다.

이번 민주당 제주도 경선을 보자. 동원 경쟁이 불붙다보니 각 주자 진영에 중복으로 경선참여 신청을 한 사람이 1만7000여명이나 나왔다. 기재한 글씨체가 똑같은 신청서도 수백장씩 무더기로 발견됐다. 신청서는 대부분 마감날 각 주자 진영이 수천장씩 한꺼번에 제출했다. 자기가 직접 쓴 신청서를 들고 민주당 당사를 찾은 사람은 얼마나 될까. 문제는 그렇게 무더기로 제출된 신청서가 ‘맨손’으로 만들어졌을까 하는 점이다.

어느 경선 주자를 위해 일하는 조직책의 한숨 섞인 얘기가 새롭게 들린다. “내가 갖고 있는 카드 7장이 모두 거래 정지됐다. …어제는 나에게 평소 ‘형님’ 하며 깍듯하게 존칭하던 친한 후배 조직요원이 지방에서 전화를 걸어 ‘야, 이 ××야, 어떻게 조직 관리하라고 돈을 안 내려보내’라고 욕을 퍼부어 정말 우울한 하루를 보냈다.”

지금의 민주당 경선제도는 부작용이 클 수밖에 없다. 더 많은 국민선거인단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그 선거인단이 선출되는 ‘모(母)집단’을 최대한 ‘자기 밭’으로 만들어야 한다. 신청서를 많이 내도록 동원해야 ‘자기 사람’이 선거인단에 선출될 확률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그러니 동원에 혈안이 되지 않겠는가. 민주당 측도 그 같은 동원 자체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국민적 지지기반과 당세를 확충하기 위한 하나의 과정 정도로 여기는 분위기다.

▼대책은 없는가▼

그러나 어떤 형태든 동원정치는 가장 후진국적인 정치 수법이다. 권력에 의한 협박이든, 돈과 이권을 이용한 유인이든, 광신적인 조직에 의한 것이든 어느 것이나 민주주의를 병들게 하고 왜곡시킨다.

유권자 스스로가 동원을 거부하는 게 최상의 방법이다. 끌려 다니지 않는다는 자존심과 명예를 지켜야 한다. 유권자들이 흔들리지 않는다면 주자들이 아무리 동원과 매표를 시도해도 성공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유권자는 뉴햄프셔주의 유권자가 아니니 문제다.

타락조짐을 보이고 있는 민주당의 ‘정치실험’에 동원정치의 뿌리를 캘 수 있는 무슨 대안과 장치는 없는가.

남찬순 논설위원 chans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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