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방형남/여성장(女性葬)

  • 입력 2002년 2월 9일 15시 57분


출범 1년을 갓 넘긴 여성부가 며칠전 대통령에게 보고한 올해 업무계획은 화려했다. 여성부는 ‘남녀평등의 민주 인권 복지국가 실현’이라는 정책 목표 달성을 위해 △차별과 폭력으로부터 여성의 인권보호 △생활 속의 평등문화와 의식의 정착 △여성 인적자원의 적극적 양성과 활용 등을 추진하겠다고 보고했다. 여성부는 뉴질랜드 캐나다 필리핀 등 일부 국가에만 있는 ‘선진 부처’이니 의욕이 넘칠 만하다. 더구나 우리나라 여성부는 다른 나라처럼 정책조정 업무만 담당하는 것이 아니라 남녀차별 실상을 조사해서 시정하는 강력한 권한까지 갖고 있다 한다.

▷여성부는 안타까운 현실 속에서 태어났다. 전북 군산시에서 발생한 유흥가 화재참사 사건은 여성부가 할 일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엊그제 치러진 장례식에 참석한 희생자의 유족과 조문객들은 “유대인 가스실처럼 한날 한시 봄 햇살 한번 맘껏 받지 못하고 떼죽음 당하니 원통해라”로 시작되는 시인의 절규를 들으며 눈물과 함께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14명의 꽃다운 여성들이 갇혀 지내다 잠깐 불에 몰사하는 나라에서 과연 여성부는 무엇을 해야 할까. 시민단체들이 나서서 장례식을 ‘여성장’으로 치른 이유를 헤아려야 한다.

▷업소 출입문이 밖에서 잠기고, 2층으로 통하는 문도 잠겨 종업원들이 대피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확인되자 전국 곳곳의 윤락가에 경찰 단속팀이 몰려들었다. 대형사건 뒤 잠깐씩 부는 단속바람이다. 창문에 쇠창살이 있는 업소와 외부 잠금장치가 있는 몇 업소가 적발돼 주인이 처벌을 받게 됐으나 단속 경찰과 업소 주인의 낯익은 숨바꼭질에 불과할지 모른다. 서울 종암경찰서장 시절 윤락가 ‘미아리 텍사스’와 전쟁을 치른 김강자(金康子) 총경 같은 사람이 다시 나와 한바탕 큰바람을 일으킨다면 모를까.

▷문제는 뿌리에서 찾아야 한다. 시늉만의 단속이 아니라 인신매매 노예매춘 감금영업 등 악질 범죄를 근절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여성부가 이번 참사를 계기로 유흥업소의 불법감금과 인권침해 실태를 조사할 계획이라고 한다. 늦기는 했지만 정확한 진상이 파악돼 강력한 대책이 마련되기를 기대한다. 국회도 관련법 개정을 서둘러 국민이 다시는 “노예각서도 감금도 없는 그날까지 당신들은 2000만 여성의 가슴속에 살아 있을 것”이라는 애끊는 추도사를 듣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군산 참사 희생자들의 명복을 빈다.

방형남 논설위원 hnbh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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