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이규민]국민의 기억력을 시험말라

  • 입력 2002년 1월 25일 18시 06분


아득히 먼 옛날 바빌로니아시대에도 요즘 경제학에서 말하는 임대차계약이 있었다고 한다. 예컨대 당시 가장 큰 재산 중 하나인 황소를 빌려주고 받는 계약의 기록들이 남아 있는데 임대인과 임차인간에 상당히 균형 있는 조건들을 명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계약에 따르면 황소가 사자에게 잡아먹히는 것은 불가항력적 일이라 소 주인이 손해를 감수해야 하지만 빌린 사람이 게을러 소가 굶어 죽게 되든지 혹은 부주의하게 다뤄 소를 다치게 하면 주인에게 소값을 물어내야 한다는 식이다.

놀라운 것은 당시 집권자인 왕에 대해서도 같은 종류의 상형문자로 ‘나라를 소란케 하거나 국민을 굶게 하면 책임을 묻도록’ 기록되어 있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바빌론 사람들은 소를 빌려 활용하는 것과 국가를 국민으로부터 위탁받아 경영하는 것을 크기만 다를 뿐 같은 종류의 일로 보고 그 권한과 책임을 정한 것이다. 양쪽의 공통점이 많다는 점에서 매우 흥미로운 비유라는 느낌이다.

▼친인척 비리 책임없다고?▼

그로부터 4000년도 더 지난 지금 소위 민주주의를 한다는 우리나라에서 과연 국민이 맡긴 국가경영권은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가. 권력을 위임받은 집권자가 재임 중 온갖 권력형 비리 때문에 사회를 병들게 하고 그로 인해 국민의 마음에 상처를 입혔다면 이 지도자는 바빌로니아시대가 아니기 때문에 문책되지 않는 것을 다행으로 생각해야 할 것이다.

국민이 더욱 분통터지는 일은 맡긴 권력이 바로 최고 권력층의 근위조직이나 측근 실세들에 의해 끝없이 농단되고 있었다는 점이다. 거적때기를 들출 때마다 구더기가 나타나고 있으니 앞으로 1년, 이 정권이 국가경영의 권한과 책임을 안고 있는 기간 동안 얼마나 많은 친인척 혹은 측근들의 이름이 거명될까 그것이 궁금하다.

이 와중에 청와대는 “대통령의 친인척이라 해서 대통령과 결부시키려는 시도는 잘못”이라는 해괴한 말을 했다. 이 논리대로라면 대통령 친인척이 어떤 잘못을 하더라도 대통령은 책임이 없다는 얘기가 되는데 그렇게 너그러운 사람들이라면 왜 야당시절 당시 대통령부자를 허구한 날 싸잡아 몰아세웠던가.

이토록 ‘맡아 키우던 소’를 병들고 지치게 만들어 놓고도 이 정권의 책임자가 소속돼 있는 정당에서는 차기 대권주자들이 다음번 ‘소’를 맡겠다며 출발 총성도 안 울렸는데 벌써 냅다 질러 뛰기 시작했다. 가관인 것은 그들이 말하는 어느 구석에도 과장과 허위로 포장된 자기 자랑 이외에 현실에 대한 자성의 모습은 그림자조차 없다는 것이다. 더구나 지금까지 당내 경선에 나서기로 한 6명 가운데 다른 것은 몰라도 경제에 대해 견해를 밝힌 두 후보의 발언은 과거를 기억하는 사람들을 놀리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노동부장관 시절 이른바 신노동정책이라는 미명 아래 무노동에도 돈을 주어야 한다며 정부 내 다른 부처 장관들과 좌충우돌하던 성질 사나운 사람이 갑자기 기업을 옹호하는 발언을 하면서 ‘대한민국의 최고경영자(CEO)’가 되겠다고 나섰다. 인사경영권의 부분적인 단체교섭을 인정하는 등 초혁신적인 노동정책을 제기해 기업의 거센 저항을 받고 노동현장을 분규로 물들게 했던 사람의 친기업적 변신은 감탄스럽다.

당내 경선에 불복하고 뛰쳐나와 대선에 참여했던 그의 과거를 기억하는 많은 사람들은 인생관이 수시로 변하는 그가 앞으로 또 어떤 모습으로 변할지 모르기에 ‘소를 맡길 만큼’ 신뢰성이 있는지 궁금해한다.

▼착각인가 거짓말인가▼

이 정당의 또 다른 주자는 “외환위기 당시 DJ를 도와 전 세계를 돌며 나라를 구하는 역할을 했다”고 주장했는데 그때 진짜로 금융협상의 최전선에 섰던 경제부처 관리들은 하나같이 “그는 얼굴마담이었을 뿐”이라며 ‘정치인의 후안무치’를 비판한다.

그 일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하더라도 “98, 99년에 눈부시게 발전하다가 그 후 실무자들이 DJ노믹스를 위배하는 바람에 경제가 나빠졌다”는 그의 경기진단은 분명히 잘못됐다. 2000년 들어 미국경제에서 정보기술(IT)산업의 거품이 꺼지면서 세계적 불황이 시작됐다는 것은 국내외 모든 경제학자들이 말하는 기초적이고 상식적인 분석인데 무슨 뚱딴지같은 얘기인가. 그런 그가 경제대통령이 되겠다니 ‘맡길 소’의 본전부터 생각난다.

기회가 닿는 대로 등장인물들의 주의주장을 따져 보겠지만 미리 말하건대 주자들은 국민의 기억력을 시험하려 들지 말라. 신뢰성 없는 그들의 말만으로는 아직 누가 ‘소’를 살찌우고 제대로 활용할 사람인지 판단을 할 수 없다. 분명한 것이 있다면 지금 우리의 ‘소’는 분노때문에 무척 수척해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만든 책임을 물을 날이 1년도 채 안 남았다는 것이 그나마 위안이다.

이규민 논설위원 kyum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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